‘삼시 세 끼’를 챙겨본다. 끊기지 않는 아재 개그에 묘한 중독성이 있다. ‘강력햐’로 불을 피워 밥을 지어먹고, ‘쟈바라’의 도움으로 설거지를 끝내는 모습이 여유롭다. 그러다 가끔 피식 웃음이 나는 장면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
'보글 보글'이 생명인 순두부찌개가 한꺼번에 끓지 않았다. 순차적으로 밥상으로 옮겨내던 차승원 씨가 가장 먼저 끓었던 뚝배기를 자신 몫으로 남긴다. 막 불에서 내려 더 맛있는 타이밍의 순두부를 다른 사람에게 먹이기 위해서다.
각자의 그릇에 올릴 비빔밥용 프라이를 굽던 중 계란 노른자 하나가 깨져 모양이 어그러졌다. 무심하고 시크하게 그것은 차승원 씨 비빔밥 안으로 쏙.
이미 끓은 뚝배기나 망가진 계란을 자신의 몫으로 남기는 걸 어머니나 주부의 마음 같은 것으로 표현하던 때가 있었다. ‘가족을 위한 헌신’ 같은 포장지 문구를 그럴듯하게 둘러줬다. 삽화가 붙어 있다면, 대개 앞치마를 두른 여자 그림이었다.
직접 요리라는 것을 하고 남에게(그것이 가족이 되었건 친구가 되었건) 먹일 수 있게 되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누군가가 직접 요리를 만들어 상대에게 대접하면서, 가장 잘 되고 모양이 그럴듯한 부분을 자신의 접시에 담는 걸 본다면 도망치는 것이 좋다. 십중 팔구는 사이코패스일 것이다. 일이는 소시오패스다. 즉 평범한 사람이라면 요리를 해서 대접할 상대에게 가장 예쁜 것, 좋은 것을 먹이고 싶어 한다. 성별의 구별은 필요 없다.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그렇다.
적당한 지불의사만 있다면 어쨌든 사 먹는 것이 맛은 좋다. 숙련된 요리사가 신선한 재료를 구입해 맞춤의 기구들로 만드는 음식을 일반 가정에서 당해낼 수는 없다. 누군가를 초대해 음식을 먹일 생각을 했다면, 맛을 제외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적합한 분위기일 수도 있고, 길게 이어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경우도 있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공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고 가장 풀어진 모습으로 편안하게 즐기고 싶은 이유도 있겠다.
이 모든 이유는 요리를 대접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대접하는 쪽은 분주하기 마련이다. 적당한 재료와 그것을 손질하는 과정, 먹고 난 후의 정리 과정은 드러나면 안 되지만 상당한 노고가 필요하다. 그런 과정을 감수한 마당에 가장 훌륭한 결과물을 타인에게 내보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만일 대접받는다면 ‘칭찬’은 필수다. 차승원 씨처럼 내내 잔잔한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말이다.
보이는 부분보다 더 많은 노고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살림’이라는 것이 다 비슷하다.
방 두 개에 화장실 달린 아파트에서 시작을 했건, 창문 하나 없는 고시원에서 출발했건 혼자 살기 시작하면 깨닫게 된다. ‘적당한’ 청결을 유지하게 위해서 ‘상당한’ 노고가 든다는 것을 말이다. 보호자와 생활을 할 때는 ‘내 방’ 혹은 ‘내 한 몸’ 정도 잘 유지하면 된다. 자취를 시작하게 되면 그것이 ‘내 생활’로 급격하게 범위가 넓어진다.
‘열역학 제2법칙’ 같은 것은 몰라도, 내버려 두면 내 주위는 온통 ‘무질서’의 늪으로 빠져든다. ‘적당한 청결’을 유지하는 것에는 언제나 ‘적당함 이상의 노고’가 든다. 생활비와 공과금 때문도 있지만, 그 보다 먼저 언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내 머리카락과 눈 돌리면 보이는 먼지 때문에 힘들다. 세월이 빠른 것도 지치지만, 어느새 때가 되어 이사를 하고 또 신고를 해야 하는 절차들 때문에 더 늙는 기분이 든다. 이런 일들은 잘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이 정도 되고 나면, 한때 나의 보호자였던 사람(부모가 되었던 친척, 조부모가 되었건)의 입장이 서서히 이해된다. 앞으로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더라도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보호자와 살면서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도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건 사람을 너무 띄엄띄엄 보고 하는 소리다. 내가 좋은 입장인데 굳이 안 좋은 쪽과 바꿔 생각해주는 사람은 없다. 당해봐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이런 이유로 나는 30이 넘어 자취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생활인의 면’에서는 신용하지 않는다. 화장실 휴지가 얼마나 빨리 소진되는지, 침대 아래까지 치우지 않으면 얼마 만에 먼지 뭉텅이가 돌아다니게 되는지는 교과서에 안 나오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누군가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기쁨은 느껴봤으면 좋겠다. 아주 간단한 것이라도 된다. ‘대접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남이 차려준 음식 먹어본 적이 꽤 됐다. 흠, 나의 지인 전선에 이상이 생긴 것인가, 코로나의 영향인가. 아무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