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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05. 2023

외로운 우리를 바라보는 낙관적인 시선

- 연극 키리에(Kyrie)

티켓 예매처에 적힌 이 연극에 대한 설명은 이랬다.


독일 검은 숲, 죽으러 온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바로 그 숲. 근처에 집 하나가 있다. 천재 한국인 여성 건축가가 지은 집이다. 건축가는 30대의 이른 나이에 과로사하고, 그의 영혼이 그가 설계한 이 집에 깃든다………

'독일', '신비한 숲', '천재 건축가'…… 어쩐지 중세를 배경으로 한 순정만화에 어울릴 법한 단어들이다. 이런 단어들로 피곤에 찌든 나를 늦은 시각 객석 앞에 앉아 있게 만들 수는 없다. 인생도 외롭고 힘든데 굳이 순정순정하고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보겠다고 먼 길을? 하지만 극단 이름을 확인한 후 스케줄을 잡았다. 이 극단에서 만든 작품은 관객을 이상하게 끌어당긴다. 리뷰를 쓸 수도 없는 괴작을 만날 수도 있지만(대학로에 이런 작품들도 은근히 많습니다) 한번 가보지 뭐, 이런 마음으로 극장으로 향했다.



무대는 온통 검은색이다. 몇 개의 의자와 베개가 뒹굴고 가방 하나가 던져져 있다. 무대 깊숙한 곳에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무덤 속 예수의 시신]이라는 그림이 놓여 있을 뿐 그냥 텅 빈 검은 공간이다.


극이 시작되면 목소리가 들린다. 독일에 살던 한국인 건축가의 음성이다. 어쩌다 자신이 지은 집 속에 깃들게 되었는지, ‘깃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설명한다. ‘인간이 집에 깃든다’는 설정은 듣기에 따라 유치해 보일 수도, 무서워 보일 수도 있지만, 25년 전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가 딛고 있는 현실과 똑같은 바닥에 서 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분명하다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마침내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스스로를 ‘집’이라고 칭한다. 25년 전에 죽은 사람에게 과거의 이름이 중요할 리 없다. 25년 동안 집 그 차제로 지내왔다면 그냥 그를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비가 내리는 어느 봄, 두 사람이 이곳으로 이사 온다. 전직 무용수였지만 근육이 굳어서 이제는 죽기 직전인 독일인 남자와 그의 부인이자, 한때 그와 함께 무용을 했던 한국인 여성 엠마다. 엠마와 남편은 무대에서 만났다. 남편은 하데스를, 엠마는 에우리디케를 연기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아내다. 숲을 산책하던 중 사고로 죽어 하데스의 세계로 들어간다. 하데스는 저승까지 쫓아와 아내를 찾는 오르페우스에게 감동해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떠나도록 허락한다. 단 이승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승에 도착하기 직전 아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걱정된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다. 에우리디케는 그대로 다시 하데스의 세계로 떨어진다.


엠마와 남편이 행복하고 사랑했던 시기는 분명히 있었다. 남편의 몸이 굳기 시작하고, 무용을 그만두게 되고 급기야 엠마가 무용하는 것마저 질투하게 되기 전에는. 엠마는 남편의 세계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하데스의 세계로 떨어진 에우리디케처럼.



그런 그들이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엠마는 집을 손질한다. 스승을 위해 만들었던, 숲에서 채집한 버섯을 넣은 초콜릿을 만들고, 방을 정리하고, 광고를 한다. 자살하기 위해 검은 숲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묵을 숙소가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여름과 가을, 겨울을 거쳐 이 숙소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손님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평범하고 어쩌면 낯설다. 혹은 그들의 이야기 중 이런 조각과 저런 조각이 나의 삶과 닮아 있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하고 고달픈 그들의 삶이 내 삶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엠마의 숙소에서 하루를 혹은 며칠을 지낸 후 숲으로 들어간다.




텅 빈 무대는 배경보다 오히려 소리를 증폭시키는 수단처럼 이용된다. 배우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하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가슴에 맺힌 것이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낮게 꺼질 리 없다. 그들은 외치고 절규하고 한탄한다. 하지만 그 끝은 낙관적이다.


삶과 죽음, 자살이나 아픔을 다루는 연극이기 때문에 시종일관 엄숙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의외로 웃음 포인트가 많다. 집은 엠마의 보살핌에 감동한다. 엠마라는 존재가 가진 고통과 따뜻한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 집이 눈물을 흘리면 집에는 누수가 일어난다. 이런 식이다. 상상할 수 있지만 배우들의 행동과 말에는 웃음이 터진다. 이런 것들이 극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다.


근래에 본 가장 낙관적인 연극이었다. 원작의 매력이 크겠지만 어쩐지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이야기를 현실로 이어준 것은 배우들의 힘이었다. 최희진 배우와 유은숙 배우가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꽉 잡은 후 백성철 배우가 이야기의 몰입도를 끌어올렸다. 쌍둥이 같은 젊은 목련과 분재, 조어진 배우와 윤미경 배우의 생기는 전체적인 흐름에 활기를 주었다. 누구 하나 빠짐이 없다. 모두에게 박수를.




이 연극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연인 때문에, 가족 때문에, 혹은 친구 때문에 그러니까 온통 타인과의 관계 때문에 상처받고 좌절한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가 늘 그러는 것처럼. 극 중 인물인 관수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잘해보려고 그런 거야.


우리는 다 이런 생각을 하며 타인들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잘해 보려고, 잘해 주려고. 하지만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나의 행동은 타인들에게 상처가 되고 실망이 된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을 이 연극은 보여준다. 어떻게? 직접 확인하시길. 이 연극은 12월 11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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