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투사가 되고, 누군가는 생계가 되었다.
" 내가 서울대생을 낳았어요! "
오빠가 서울대에 붙은 날 엄마는 앞치마를 두르고 집 앞 골목길을 돌고 또 돌았다.
이웃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을 때마다, 엄마의 볼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발그레했다.
" 서울대. "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서울대' 그 세 글자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만식이만 잘되면 돼." 하며, 밤새 졸음과 싸워가며 도라지를 까던 엄마의 모습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엄마의 주문은 정말로 효험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참을 방황하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다잡더니
집안 사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결국, 덜컥 서울대에 합격해 버렸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오빠의 합격 소식에 잠시나마 '가난'이라는 말의 무게를 잊었다.
오빠의 합격소식을 동네 복실이도 알게 될 때쯤,
퇴근길에 약재 주문표를 받으러 보생당에 들렀다.
언제나 인자한 얼굴을 하고 계신 보생당아재는 약재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 만식이 서울대 합격했다면서, 잘했네. 잘했어. 이제 네 엄마 고생 끝났네 "
" 그리고 이거, 오빠한테 전해줘라. 합격선물이다! "
손에 들린 보약 한 재.
한약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보약을 받았다.
"네..."
샐쭉한 표정을 읽은 듯, 아재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너도 이제 슬슬 공부해서 대학 가야지. 여자도 배워야 하는 세상이야.”
아재가 무심히 던진 말이었지만, 내 심장은 조용히 움츠러들었다.
"… 아재, 저 이제 공부 안 해요."
입에서 나온 말은 작고, 낮고, 말끝이 꺾여 있었다.
마치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아재는 내 눈을 한번 쳐다보더니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내 어깨를 두드렸다.
" 그래도 희망은 있어야지, 명순아."
나는 웃지도,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조용히 속으로만 말했다.
‘우리 집엔 오빠 하나면 돼요. 난… 아니에요.’
엄마가 매일매일 주문처럼 외우던 그 말이, 이제 내 가슴에 와 박혀있었다.
그즈음 나는 책상 앞에 앉는 시간보다, 기타 소리에 귀 기울이던 시간이 더 많았다.
밤이면 창문 밖 별빛 아래서 시집을 꺼내 읽는 것이 유일한 위로였고,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편안한 삶’뿐이었다.
엄마는 그것조차 몰랐다. 아니, 모르는 척하는 것이 분명했다.
오빠는 서울대에 들어간 뒤 달라졌다.
뭔가 생각이 많아진 사람 같았다.
말수도 줄고, 표정도 잔잔해졌고, 무엇보다 늘 한 손엔 두툼한 책이 들려 있었다.
하루는 무심코 물었다.
“오빠, 그 책 뭐야?”
오빠는 고개만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냥… 생각 좀 하는 책.”
칼 마르크스의『자본론』
그 책이 오빠의 눈빛을 바꾸었을 때,
나는 느꼈다.
엄마의 하늘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걸. ..
오빠는 성실했다.
학기마다 성적표를 받아올 때면 엄마는 좁은 부엌을 분주히 오갔다.
" 오늘은 고깃국이다! "
오빠 앞엔 고기 건더기가 수북했고, 내 앞엔 멀건 국물만 담긴 그릇이 놓였다.
그런 날이면, 엄마 얼굴엔 꽃이 피었다.
오빠는 얄미웠지만, 나는 그런 엄마의 얼굴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래 그거면 됐다.
성실한우리는,
도라지를, 미싱을, 공부를 꾸역꾸역 치러냈고,
그리고 마침내,
“엄마, 종로 무역회사 합격했어요.”
오빠는 엄마의 기도에 응답했다.
오빠의 취직소식에 엄마는 그 자리에서 입을 막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 드디어 우리 집에도 해가 떴다! "
" 아이고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만식이 아버지 고맙소 고맙소! "
엄마는 모든 덕을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온갖 신들과,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돌렸다.
그리고 그렇게 웃음기 가득한 엄마 얼굴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동대문으로 달려가
오빠의 첫 양복을 맞춰왔다.
오랜만에 맡는 새 옷냄새에서 왠지 '편안함'이 퍼져 나왔다.
그날도 엄마는 도라지를 깠다.
새 옷 냄새가 희미하게 남은 집 안은 평소보다도 고요했다.
오빠는 문을 닫고 책을 읽고 있었고,
문틈 사이로 흐릿하게 흘러나오던 라디오 소리,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사각거림이 들렸다.
나는 어쩐지... 그날의 정적이 불안했다.
오빠가 손에서 놓지 않던 그 책은, 이상했다.
겉으로는 고등학생도 읽을 법한 두꺼운 참고서처럼 생겼지만,
오빠가 그 책을 읽고 난 뒤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낯설고, 깊고, 어딘가 슬펐다.
왠지 사라진 조장언니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 명순아, 너 이거 무슨 책인지 아니? "
오빠가 조심스럽게 묻던 그 밤이 생각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몰라. 어려워 보여. 그런 건 왜 읽어? "
오빠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책을 가슴에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
" 이 안에,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다 있어."
그 한마디는 마치 벽에 조용히 스며드는 물기 같았다.
겉으론 아무 일도 없는 듯하지만, 안쪽에서 천천히 무언가를 썩게 하는.
그 이후 오빠는 ‘서울대생’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아버린 사람’처럼 변해갔다.
오빠의 말은 조심스러워졌고, 눈빛은 멀어졌으며,
엄마가 고깃국을 끓일 때도 오빠는 잘 웃지 않았다.
도라지를 깔 때 손끝이 터져도 참고 일하던 엄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견디고 있는 사람 같았다.
책이 무서운 건, 활자 때문이 아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설명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저 서울대를 믿었고, 오빠는 자본론을 믿기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누구는 그 책 한 권 때문에 대학을 잃고, 직장을 잃고, 가족까지도 잃었다는 걸.
엄마는 그걸 몰랐다.
그저 평생을 도라지를 까서 장남 뒷바라지를 할 뿐이었다.
오빠가 첫 출근을 앞둔 바로 전날 밤이었다.
새벽 4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쿵, 쿵, 쿵.
“누구세요! 왜 이래요!”
엄마가 허겁지겁 문을 열기도 전에, 사복 입은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좁은 마루를 차가운 구둣발이 찍고 지나갔고,
잠에서 깬 쌍둥이들은 이불속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왜 이럽니까! 우리 아들이 뭘 잘못했다고 이럽니까! "
엄마가 사복입은 남자들에게 매달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남자들은 단호했다.
오빠의 손목을 잡고, 단번에 밖으로 끌어냈다.
" 오빠… 오빠!! "
나는 그제야 목소리를 냈지만,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몸을 맡긴 채, 무거운 그림자처럼 그저 사라져 갔다.
오빠의 얼굴에는 두려움도 없었고, 기대도 없었다.
그저... 모든 걸 체념한 듯한 침묵뿐이었다.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고,
바닥에 흘러내린 치맛자락은 마치 무너진 삶 같았다.
그날 이후, 엄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방바닥만 쓸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손은 여전히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부터였을까?
우리 집에 가난보다 더 큰 재앙이 몰려온 것이...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아무 기척도 없이 오빠가 돌아왔다.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에 뛰어나가 보니, 오빠가 서 있었다.
눈빛은 퀭했고, 입술 형편없이 말라 있었다.
그저... 말 대신 침묵으로만 가득한 얼굴.
그 안엔 체념도, 피로도, 슬픔도 다 말라붙은 듯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간 오빠는,
이불속으로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숨겼다.
" 오빠... 무슨 일이야? 괜찮아? "
나는 오빠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오빠는 한쪽벽으로 조용히 몸을 돌아 누울 뿐이었다.
뒤돌아 누운 오빠의 등에는 여기저기 퍼런 멍으로 물들어 있었고,
깡마른 팔다리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 두려워하고 있었다 '
그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힌 오빠는
살아있는 듯 살아있지 않은 사람처럼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숨소리는 있었지만,
오빠의 온기는 집 안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오빠가 돌아온 날.
우리 집에는 그날 이후,
입지 못한 새 양복과
말 없는 불행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다시 도라지를 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톱 밑이 파래질 때까지 도라지를 깠다.
한 번 무너졌던 사람이란 믿기지 않을 만큼,
엄마는 금세 자리를 펴고 앉아
국을 끓이고, 장을 봤다.
" 그냥 사는 거지, 폭폭 해도 그냥 사는 거야. "
엄마는 그 말을 입버릇처럼 중얼였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살았다.
울지 않았고, 묻지 않았다.
오빠가 서울대를 그만뒀을 때도,
새언니가 집을 나갔다며, 조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엄마는 그저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기껏해야, 가끔 도라지를 까다 멈춘 손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흐릴 뿐이었다.
" 아이고, 박복한 년. 숨 한번 붙이기가 이리도 폭폭 할꼬..."
곱게 다림질된, 상표도 떼지 않은 옷.
그건 오빠의 내일을 위해 준비된 옷이었다.
하지만 그 양복은 입혀지지 못했다.
나는 문 틈으로 보이는 새 양복을 몇 번이고 다시 바라봤다.
한쪽벽 구석에 말 없는 내일이 힘없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