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감춘 밤, 무대는 나를 빛냈다

나이트클럽의 불빛 아래, 나는 다시 태어났다.

by 이지아

"명순아, 너... 괜찮지? "


순애 언니가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요?”


“그냥… 요즘 말이 없어서.”


순애언니말이 맞았다.

사실 정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가슴 한편에서 뭔가 쏟아질 것만 같았고, 그걸 도로 주워 담을 자신이 없었다


미자 언니가 죽고, 조장 언니가 사라진 뒤로
공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낯설기만 했다.

기계 소리도 그대로였고, 바늘 돌아가는 소리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익숙한 풍경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졌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창가 구석 거기, 미자 언니 자리였는데
이젠 낯선 여공이 앉아 있었다.


성격도 괜찮고, 말도 곧잘 섞지만,
언니의 보리차 내음은 없었다.

조장 언니가 돌리던 미싱은 지금은 말없이 다른 손에 들려 있었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앉았고,
일은 그대로 굴러갔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치 거기, 언니들이 있는 것 같아서...


“명순아, 실 다 감았니?”


반장 언니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네! 지금 다 감고 있어요!”


나는 예전처럼 실을 감고, 미싱에 발을 올리고, 하루하루를 채웠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누가 킬킬 웃으면 그게 미자 언니 같아서 고개를 돌리고,
누가 책장을 넘기면 조장 언니가 떠올라 가슴이 찌릿했다.


'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냥, 멈춰 있는 거 아닐까?’

미자 언니는 참기만 하다 그렇게 가버렸고, 조장 언니는 무언가를 했다...


그런데 나는?
실을 감고, 바늘을 밟고, 숨만 쉬고 있었다.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너무 늦기 전에, 뭔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자꾸 무대가 떠올랐다.
화려한 조명 아래 울리던 기타 줄 소리.
손끝에 남았던 떨림.


‘그게 그냥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주 작고 조용한, 하지만 확실한 갈망이었다.


가슴 안쪽에서 자꾸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 명순아, 너는 기계보다 무대가 어울려. 거기선 네가 눈을 반짝이더라."


" 명순아, 하고 싶은 거 해도 돼. 네가 다 책임지지 않아도 괜찮아 "


숨만 쉬고 있었던 나의 하루에,

언니들의 목소리가 남은 허공이 자꾸 다가왔다.


그리고,

그날 밤이 자꾸 떠올랐다.
형광 조명 아래, 기타 줄 위로 흐르던 그 떨림.
언니가 '무대'라고 불렀던 그곳이,

왜 그렇게 가슴을 뛰게 했는지 모르겠다.


' 진짜 나 ' 는 거기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잠깐 꿈을 꾼 걸까?


그날 밤,

무대 위에 남았던 그 떨림이 아직도 내 손끝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꿈이었더라면, 너무 아까운 꿈이었다.


그 꿈을, 그냥 지나가게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 뭐 하러 왔니? "


처음엔 그냥 걷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일요일 오후, 오랜만에 쉬는 날이었다.
집에 있어도 답답했고, 방 안엔 숨이 막혔다.

길을 따라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새 거기였다.


반짝거리는 간판 밑, 담배 냄새가 배어 있는 입구.
형들이 연습하던 그 나이트클럽.


" 에이, 괜히 왔나... "
발끝이 멈칫거렸다.
그냥 돌아서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에 갈 수 있었다.

근데 발이, 그게 안 됐다.
몸이 문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문을 여는 순간—


“야! 저기 , 명순이 아니야?”


기타 줄을 튕기던 형이 먼저 나를 알아봤다.


" 너 요즘 왜 안 와? 기다렸잖아, 진짜."


“형, 그냥... 일이 좀 많아서요.”


사실 나는 혹시나,

조장언니가 다녀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형, 언니 소식은 못 들었어요? "


" 글쎄다, 우리도 못 본 지 한참 됐어. "


' 여기에도 안 오는구나. 이제 언니는 영영 볼 수 없나... '


애써 아쉬운 마음을 감추고 발길을 돌려 작별 인사를 했다.


" 형... 나 다음에 올게요..."


“ 그냥 갈려고? 에이, 천재가 그렇게 사라지면 우리 섭섭하지.”


나는 어쩔 줄 몰라서 그냥 씩 웃어 보였다.


"그래, 오랜만에 우리 명순이 기타 한 곡조 좀 들어보자 "


형들의 눈빛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말 한마디에…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날 나는 오랫동안 남아, 합주연습을 했다.


갑자기 세션 형이,


" 여기 코러스 한번 넣어볼래? " 하길래


쭈뼛거리며 소리를 얹었다.


그때 드럼 형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명순아, 너 보컬 해도 되겠다. 음색 죽인다.”


" 진짜요? 무슨... 그냥 동네 수준이죠 ”


그날 밤, 돌아가는 길에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따뜻했다.
마음 어딘가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다.


며칠 뒤였다.
연습 중이던 형이 다급하게 말했다.


" 야야, 큰일 났다. 오늘 여자 보컬 펑크 났어."


" 네? 그럼 어떡해요? "


" 너밖에 없다. 명순아, 네가 대신 서줘. 리허설이라도."


" 저요? "


" 그래, 부탁한다. 그럼 자, ‘남포동 블루스’ 간다.”


그렇게 마이크 앞에 섰다.
손이 덜덜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심장은 목구멍까지 올라왔고,
‘나 진짜 이거 해도 되나’ 싶었다.


첫 소절.


네온이 춤을 추는 남포동의 밤~


숨이 멈췄다.

아니, 숨이…
너무 조용했다.


내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공간을 메우는 순간,
그 안에 있던 내가 달라졌다.


그 안에선, 내가 아니었다.

기름 냄새가 밴 작업복도, 뒤척이던 점심 도시락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 와... 야, 이건 반칙이지."


형들이 박수를 쳤다.

누군가는 웃으며 말했다.


" 이건… 데뷔각이다. "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몰랐다.
근데 이상하게, 믿고 싶었다.


며칠 뒤, 클럽 사장님이 불렀다.


" 명순이. 너 고정 보컬 한번 해볼래? 주말 위주로. "


웬일인지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뭔가 ‘문’이 하나 열린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로운 내가,

그 문틈 너머에서 조용히 손짓하고 있었다.


뒤돌면 다시 사라질 것 같아, 나는 조용히 그 문을 열기로 했다.




" 명순아, 너 요즘 왜 이렇게 환해졌냐? "


순애 언니가 슬쩍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 어휴, 뭐 좋은 일 있어? 얼굴이 맨날 빛나네? "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를 올리며 대충 웃었다.


" 아뇨, 그냥… 잠을 좀 잤나 봐요. "


" 요거요거 이상한데? 살도 빠졌고, 눈에 반짝이는 게 있구먼."


" 혹시… 연애하냐? "


다른 동료까지 한마디 거들자, 다들 킥킥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음으로 넘겼다.

그 웃음 안에 몇 백 마디쯤 되는 말을 꼭꼭 숨긴 채로.

퇴근길, 미싱기름 냄새가 채 빠지지 않은 내 옷에
슬쩍 화장품 냄새가 섞였다.
가방 안엔 작은 파우치, 무릎 위엔 구겨진 악보,
마음속엔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비밀 하나.


" 엄마, 친구랑 밥 먹고 올게요."


집을 나서며 항상 하던 말.
그 말 한 줄이 이제는 거짓말이었다.


실밥이 끼인 손톱을 급히 정리하고,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면,
내 얼굴에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반짝이는 나.


" 명순아, 이 노래 너 해봐. 오늘 관객 괜찮아."


형이 웃으며 마이크를 내밀었다.


" 연습했던 ‘그 겨울의 찻집’ 있잖아. 너 감정 잘 잡더라."


" 형... 나 아직 잘 몰라요. 가사도 헷갈리고..."


" 에이, 몰라도 돼. 네 감정이 다 했다니까."


마이크를 잡고 무대 앞에 섰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뛴다.
공장에서 백 번 미싱 밟을 때보다 더 세게.

기타 줄 소리가 들리고, 조명이 얼굴을 스친다.

가슴속에 있던 것들이
마이크를 타고 천천히 흘러나온다.


" 야, 너 진짜 뭐야. 노래도 잘하고 기타도 잘 치고.
우리 밴드 먹여 살리겠는데? "


" 맞아. 사장님이 오늘 명순이 보고 흐뭇하게 웃더라. "


" 야, 너 진짜 뭐야? "


드럼 치던 창수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저렇게 부르고... 어이없다, 진짜."


말은 그랬지만,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 하하, 우리 밴드 먹여 살릴 사람 나타났다~ "


건반 치던 덕배 형은 장난스럽게 외치며 박수를 쳤다.


" 사장님 아까, 무대 끝날 때 눈이 촉촉하더라."


웬일인지, 말수가 없는 베이스 상진형까지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 오늘 멋졌어 "


형들은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 말이 내 귀엔 진짜처럼 들렸다.

누군가 나를 부러워하는 눈으로 본다니.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말이야, 명순아.”


창수형이 조심스레 나에게 물었다.


" 너 계속 공장 다닐 거야? "


나는 그 순간 말을 잃었다.


"... 어, 글쎄요... "


그날 나는 공연비로 공장 한 달 봉급보다 많은 돈을 받았다.


나는 처음으로, 내 목소리가 돈이 되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텔레비전에선 누군가 크게 웃고 있었다.
연예인들이 어깨를 치며 낄낄대고, 자막이 번쩍였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시끄러운데, 우리 집은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 쪽을 힐끔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이주일 진짜... 웃기네~ "


나는 뭔 말이라도 꺼내보려 했지만,

엄마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도라지만 계속 깠다.


" 명순아."


"... 응? "


" 요즘, 야근 많냐? "


그 말에 손끝이 식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 응… 공장에 물량이 많아져서."


" 밤에 너무 늦게 다니지 마라. 요즘 어수선하다."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고, 단단했다.
엄마는 눈도 들지 않고, 그 말만 툭 던졌다.


마치 이미 알고 있으면서, 마지막 확인만 하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들켰을까 봐, 아니길 바라며.

방 안은 숨이 막힐 만큼 조용했다.


그날밤,
나는 립스틱을 꺼내며 거울 앞에 앉았다.


" 그냥, 다 말해버릴까? "


혼잣말처럼 중얼였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 안 돼. 엄마한텐 안 돼.'


장밋빛 빨간 립스틱은 천천히 내 입술을 덮었고,
손끝은 자꾸만 떨렸다.

화장을 마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엄마, 친구 만나고 올게요."


대답은 없었다.
도라지 껍질만 뽀드득 소리를 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도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 오늘은 ‘그 겨울의 찻집’ 어때? "


형이 물었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무대 위 조명이 쏟아질 때,
나는 ‘누구의 딸’이 아니라
그냥 '나'였다.


조명이 붉게 내려앉자, 형들이 기타 반주가 시작되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한껏 긴장한 내 목소리가 천천히 스피커를 타고 흘러갔다.


그때 무대 왼편에서 왠지 모를 시선이 느껴졌다

베이스 상진이 형이었다.


내가 노래를 이어가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춰줬다.


아무 말도 없지만, 묘하게 마음이 안정됐다.

그건 칭찬도 아니고, 지시도 아니고,
그냥 '괜찮다'는 눈빛.


노래가 절정으로 치닫자,

관객석에서 사람들이 잔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 앵콜, 앵콜 "


무대 아래로 땀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인 열기가 확 올라왔다.

노래가 끝났는데, 환호는 식지 않았다.”


몇 곡의 노래를 더 부른고,

무대를 내려와 분장실 거울 앞에 앉았을 때.


" 오늘 진짜 좋았어."


상진이 형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조용했지만,
눈빛에서 뭔가 따뜻함이 느껴졌다.


상진이 형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말고는,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이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지만, 마음은 조용히 흔들렸다.

엄마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하나 더 생겼다.
이번엔, 반짝여서 더 숨기고 싶어진 비밀이었다.


하지만 숨긴다고 사라지는 마음들이 아니었다.





『도라지꽃』 시즌1, 이제 단 1화만 남았습니다.


이야기는 끝을 향하지만,

명순의 인생은 이제부터 진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다음 회차는 시즌1의 마지막 이야기 입니다.

그녀가 선택한 그밤의 결정, 함께 지켜봐 주세요.


시즌2는 7월, 『도라지꽃』이 다시 피어납니다.


'작가 구독'으로 다음 여정을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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