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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퇴사 후 3개월간 변화

D+88

by 너굴씨

오늘자로 퇴사한 지 88일을 훌쩍 넘겼다.


작년 연말(이라고 해봤자 며칠 전이지만)에 느꼈던 불안감은 새해가 되자 삶에 대한 애정으로 바뀌었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충만히 보내는데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작년 12월은 재취업에 대한 걱정으로 다른 걸 해야지 하면서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나는 이력서를 내고 결과를 기다리며 계속 휴대폰과 메일함만 뒤적거릴 뿐이었다. 무작정 취업 준비만 하려고 퇴사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불안함에 미뤄뒀던 일을 했더라면 2022년을 뿌듯하게 마무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30대에 특별한 계획 없이 용감하게(또는 겁도 없이) 자발적으로 생퇴사를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 3개월 간 내가 느꼈던 감정 변화를 기록해 본다. 이걸 보고 누군가가 생퇴사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이 정도면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 달 차 : 행복

퇴사 직후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했다. 특히 나는 가을에 퇴사했기 때문에 하늘도, 날씨도, 낙엽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거기에 퇴직금과 직전 월급까지 있으니 생활도 풍요로웠다. 그 회사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닌데 왜 그렇게 그곳에 절절매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한편, 서류에 인적사항을 쓸 때 무소속 또는 백수라고 쓰거나,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쉬고 있다고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내가 사회적으로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음을 느끼며 약간의 고립감이랄까 소외감이랄까 묘한 감정이 들었다.


퇴사하자마자 날아온 건강보험 지역가입자 전환 안내우편... 생각도 못했다.

회사 울타리에서 지원받고 보장받는 게 생각보다 많았다. 역시 없어져 봐야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도 해방감과 자유가 다른 것보다 더 컸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직은 내 영혼은 회사를 벗어나지 못했는지 지금쯤이면 이런 업무가 진행되고 있을 텐 데라는 생각이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내 머릿속에서 회사를 비우는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산책을 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여유를 만끽하는 것만으로 좋았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고 움직이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happily ever after'이었으면 좋겠지만 인생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두 달 차 : 취업 불안감 엄습

조금씩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집순이 타입이 아니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친구들은 일하느라 바빴고 나는 빈둥거리느라 바빴다. 아침 산책 후 집에 들어가는 길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퇴사할 때는 일이 정말 하기 싫었는데, 쉬다 보니 그냥 거기서 그 사람들과 그렇게 일하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물론, 이전 직장을 다닐 때는 꾹꾹 눌러 참으며 상사와 동료들과 잘 지내긴 했다.


경력직이라 채용공고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기존 경력과 연결되는 곳에 지원서를 넣었다. 당장 취업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수많은 서류 탈락과 얼마 안 되는 면접에서도 탈락하다 보니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렇게 영영 쉬게 되는 건 아닐까? 아직은 직장생활을 조금더 하고 싶은데라는 마음에 1일 1 지원을 목표로 이력서를 열심히 뿌렸다.


주변에서는 퇴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뭘 그렇게 불안하냐 했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게 취업인데, 거기에 30대 취준생이니 불안감은 배로 커진다. 몇 년간의 경력이 있고 눈만 낮추면 취업은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경력이 있는 건 장점이지만 그에 비례해 나이도 많고 직전 연봉도 그들이 제시한 것보다 높기 때문에 나를 뽑는 것보다 경력이 더 적어도 어린 친구를 뽑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익이었는지 눈을 낮춰 지원한 곳은 거의 연락이 없었다. 30대에 알바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세 달 차 : 현실 수용

이력서를 약 30개를 넣었고 4곳에 면접을 봤지만 여전히 내 자리를 찾지 못했다. 서류는 되겠지 했던 곳은 떨어지고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던 곳은 서류가 붙기도 했다. 인생은 알 수 없다.


취업의 7할은 운인 것 같다. 내 경력과 일치하는 채용공고가 뜨고, 그 기업의 인재상과 내가 맞아야 하고, 면접관과 나와의 합 등등이 다 맞아떨어져야 최종합격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떨어진 곳들은 그저 내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어떤 능력이 있든, 경력이 있든, 맞는 자리가 있어야 갈 수 있다.


생각해보면 처음 취업할 때도 내 전공을 좋게 봐주셔서 뽑혔었고, 그다음은 마침 내가 계약직으로 일했던 업무가 메인인 정규직 공고가 있어 합격했다. 내 친구도 지원했던 회사에서 전임자가 남자여서 이번에는 여자를 뽑기를 원했고, 친구가 들은 전문인력교육을 수료한 사람을 뽑다 보니 친구가 뽑혔다고 한다. 이렇게 내 자리라면 어떻게든 된다. 이번에도 나와 맞는 곳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꾸준히 채용공고를 찾으며 지원을 하고 있다.


지난달은 취업준비에 매몰되어 하루하루를 잘 보내지는 못한 것 같다. 내 하루를 잘 돌보며 취업준비를 해야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벼운 유산소 운동을 하고 한동안 놓고 있던 영어 공부 그리고 틈틈이 독서를 하며 충만한 하루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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