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 Apr 27. 2024

나의 웃음벨

 나는 세상과 인간을 약간 비관적으로 보는 편이면서도 막상 누군가를 대할 때는 위트가 넘치는 사람인 양 구는 편이다. 내가 힘든 상황을 묘사할 때조차 왠지 한 번은 가볍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내가 타인의 감정에 쉽게 공감할 수 있듯 남도 나의 어떠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겠구나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어릴 땐 재미있고 웃긴 친구들을 좋아했고 선망한 적도 많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원대한 꿈 까지는 없었지만 초등학교 친구와 홈쇼핑 대본을 직접 준비해 반 장기자랑에 나갈 정도로 개그욕심이 항상 꿈틀대던 시기도 있었다. 겉은 차가운 도시어른이 되었지만, 누군가가 당신 참 웃기고 재밌게 말한다라는 한마디 해주면 그 칭찬이 하루, 아니 일주일까지도 뿌듯하게 만들기도 하는 걸 보니 집착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인정욕구가 자리 잡았다고 볼 수는 있겠다.


특히 초면인 사람들과의 경험에 따르면 한 사람이 먼저 건네는 작은 농담은 수줍게 닫혀있던 누군가의 입술을 열리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사람이 편안해 보일 때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도 편안해지기 때문에 남을 위하는 행위처럼 보이면서도 정작 나를 편하게 하기 위해 진화된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코미디언들이 정말 존경스러운 점은 때로는 원치 않는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핑퐁이 오가는 상황 속 순발력 있게 던진 한마디가 다른 사람의 더 큰 목소리에 묻힌다거나, '아-' 외마디 반응만이 나온다거나, 두수 세수를 생각해 생각하고 던진 나름의 고차원 개그가 왜 웃겼는지에 대해서 10초 이상 설명해야 할 때 등등. 이런 무안하고 당황스러운 순간들의 경우의 수가 얼마든지 나에게 생길 수 있음을 인지하며, 코를 쓱 훔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넘길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에게 하루의 웃음 최소 필요량이 있을 텐데 1%도 즐겁지 못한 날은 대체로 힘든 것 같다. 나의 경우, 남편이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날은 더욱 오두방정을 떨게 된다. 그러면 그가 하하하 웃고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덕에 오늘 처음 웃는다"라고 말이다.


내가 웃기기 힘든 날에는 같이 앉아서 꼭 재밌는 것 하나라도 찾아서 보는 편이다. 당연하지만 웃기고 싶은 사람도 앉아서 웃고만 싶을 때가 있다. 대화에 필요한 에너지를 쏟는 노력 없이 소파에 바보처럼 앉아서 뭐라도 나를 웃겨주기만을 바라는 때가. 그럴 때마다 찾게 되는 소화제 같은 단골 시트콤이나 코미디 쇼가 있다. 사실 이 취향이 너무 개인적이어서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닿지 않는 개그코드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찾던 것일지도 모르니 그 사람의 메모장에 적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단 나열해 보려 한다.



이미 너무나 유명한 드라마인 '빅뱅이론', '모던패밀리', '아이티크라우드', '언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 이 중에 하나라도 재밌게 봤다면 나와 비슷한 즐거움을 아래의 것들에서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먼저는 '키앤필'. '겟아웃'과 '어스'라는 무서운 영화를 만든 감독인 조던 필과 키건마이클 키가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코미디 쇼 프로그램이다. 한국어 자막이 달린 영상들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짱구 시리즈', '스파이패밀리' 같은 애니메이션 쪽도 좋고, 유튜브 개인 채널 중에는 '유병재', '원지의 하루', '침착맨', '라면꼰대', '브루스리tv', '미니멀 유목민'도 자주 챙겨 보고 있다. 좋아하는 짤은 '즈후. 걸후란?', '제주 방언 할머니(원더 like스테이션)', '(강형욱 씨의) 강조되고 반복되는 소리는...미키미키미키' 등이 있다.


독립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막 그린 듯한 가벼운 그림체가 마음에 들었던 '내 방구 같은 만화'라던가 또는 '허술하면 좀 어때' 같이 귀엽고 가볍지만 허를 찌르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책도 있다.


국내 예능과 시트콤 중에서는 '무한도전'과 '대탈출',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줄여서 웬그막)'. 여기 나오는 노구(신구) 선생의 소노, 중노, 대노, 그리고 '토달지마, 토달지마!' 대사는 가히 전설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새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나올 수 없는 시대적인 여건(?)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나열해놓고 보니 나는 B급 감성도 꽤 좋아하는 것 같은데 국내 독립영화 중에서는 '최악의 하루'를 재밌게 본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 외에도 재미난 것들은 정말 많아서 여기에 다 적으려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갑자기 마음 한편이 든든해진다.




요즘 웃을 일이 없어 밥 먹을 때 빼고 통 열리지 않는 일자의 굳게 닫힌 입술의 소유자라면 한 번쯤 소개해준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디 있을지 모르는 당신이 위의 추천작들을 보다가 한 번이라도 취향저격을 당해서 '풉.' 했다면 멀리서나마 괜스레 뿌듯할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