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건 못 참지
학창 시절 신발은 백팩과 더불어 유일한 패션 아이템 중 하나였다. 현재까지도 클래식 아이템으로 유명한 컨버스나 나이키의 조던, 덩크 하이는 당시 많은 학생들의 로망이었다. 그 운동화를 최대한 작게 신거나 '혀' 부분을 빼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는데 내 발에는 이 혀를 뺀 모습이 영 어색해 보였고 더군다나 발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루 도전했다가 그 뒤로 그러고 다니지는 못했다.
취향에 따라 교복에 구두를 신는 경우도 많았지만 겨울에는 수족냉증인 나는 발가락이 무척이나 시렸고 양말 규정에 따라 여름에는 목이 올라오는 하얀 양말에 까만 구두를 신는 게 영 예쁘지 않아 보였다. 요즘엔 학생 신분이면 치마가 제 기장이어도 예쁘고 목이 올라오는 흰 양말에 촌스러울 법한 구두까지도 정말 예쁘게 보이는데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촌스럽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어느 겨울의 수업시간, 히터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짝꿍의 구두에서 탈출한 발에선 꾸리꾸리한 냄새가 제법 심하게 올라왔다. 추측해 보자면 의외로 맨발로 많이 신기도 하는 신발이기 때문에 사계절 신기에는 관리가 어려워서였을까 싶다. 깨워서 제발 발 좀 집어넣어 달라 하고 싶었는데 그 친구는 나름 권력이 있는 친구였기에 내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진 못 했다. 아직도 그 냄새가 잊히지를 않는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캐주얼한 것도 좋지만 해외 모델들처럼 과감한 스타일도 경험하고 싶었던 넓은 도전 스펙트럼을 가진 스무 살이 되던 해. 학생신분을 벗어났으니 그토록 신고 싶었던 다리가 길어 보이는 부츠나 힐을 자연스레 도전해 보게 되었다. 유난히 발바닥에 살이 부족한 탓에 그런 신발을 신고 3분만 걸어도 발이 아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터. 그날은 교회 사람들과 볼링을 치러 가는 편안한 복장이면 충분했을 텐데, 또 그 어린 양반은 그러질 못해 모델처럼 보이고 싶은 날이었던 것 같다. 키가 168이니 높은 힐을 신으면 정말 눈에 띄게 커지는데 딱 붙는 티와 스키니 진을 입어보니 부족해 보이는 신체의 비율을 조금 수정하고픈 마음에 다소 높은 샌들 힐을 골라 신었다. 그날 마주친 한 언니가 잔소리 같은 한마디를 했다. 그렇게 높은 거 신으면 나중에 허리 나빠진다고 절대 신지 말라고 말이다. 왠지 모르게 질투같이 느껴지는 것이 내가 그 언니를 별로 안 좋게 생각했었던 건지 상당히 고깝게 들렸던 감정이 생각난다. 어쨌든 그 날도 발의 비명을 들으며 집으로 귀가했다.
대학생 시절에 유행하던 멋쟁이 신발 중에서는 내 시각에서는 오로지 멋만을 위한 제품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하야 "닥터마틴"이다. 나는 이것에 대한 환상과 더불어 이 제품이 얼마나 무겁고 피가 철철 날 정도로 뒤축에 잘 까지게 되는 가를 인터넷 후기를 통해 마스터하기에 이르렀다. 마음의 갈등이 고조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마도 스트릿 사진에 찍힌 멋쟁이들은 죄다 이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장을 지나면서 한 번씩 만져도 보고 들어도 보고 신어도 보았지만 역시나 나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매해 같은 생각을 하며 입맛만 다셨다고나 할까. 그렇게 강렬했던 유행도 지나갔다.
20대 중반이 되면서는 꽤 자주 음악 페스티벌을 다녔다. 정확히는 댄스 페스티벌이었기에 맨땅에 폴짝폴짝 몇 시간씩 뛰고 서있으면 당연히 발이 아프겠거니 싶은데 원체 건강하지 않은 발을 혹사시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되었다. 특히 수페르가 따위의 일자 바닥을 가진 캔버스화를 신고 9시간 정도를 점프 점프를 한 시간들은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한다. 내 아치는 아마 그때 완전히 고장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운동화 아닌 것을 신고 외출하는 일이 연중행사가 아니면 거의 없는 3n살이 되어보니 그때 그 언니의 말은 어쩌면 걱정 어린 진심이었을 확률이 훨씬 높았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릴 때부터 이대 앞에서 구매한 만 원짜리 아무 구두를 신어도 물집 하나 생기지 않는 타고난 튼튼한 발을 가진 초등학교 동창 친구에게 부러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나는 걷는 걸 좋아하지만 발과 발가락이 쉽게 까지고 아파오는 게 불만이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발이 고통스러우면 온신경이 발의 불편함에 집중하게 되고 어쩌면 나오자마자 집에 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초반 몇십 분을 잘 버텼다 한들 중간엔 한 번씩 어디 그냥 주저앉아 있기만 하고 싶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여름에는 가장 편할 것 같지만 은근한 부담이 가는 슬리퍼라도 신었다 하면 그 다음 날 아침이면 침대에서 내려오는 첫발을 딛기조차 힘들기도 하고 발바닥이 찌릿 찌릿 아픈 것이(족저근막염 증상) 지긋지긋해진 나는 이제 멋은 포기하고서라도 정말 하나라도 편안한 운동화를 가져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마침 자주 가던 백화점에서 무료로 발측정을 해줘 받아보니 역시나 아치가 무너졌다고 했다. 그곳에서 파는 값비싼 깔창까지 구매해 보았지만 별 효과는커녕 더욱더 아파져서 환불 사태에 이른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내 발모양을 알고 그에 보완할 수 있는 모양의 다이소 깔창이 거의 10분의 1 가격도 안 되는 데에 비해 효과는 만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러닝 전용 운동화 발맞춤 서비스를 만나게 된 후로 삶의 질이 쑥 올라갔다. 이곳에서는 내 발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어떤 모양의 운동화를 사는 게 좋은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구매도 도와주는데, 실제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한 신발을 만나게 되면서 걷고 뛰는 시간과 질이 상승했다. 평소 물건 깨끗하게 쓰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가 내내 한 몸처럼 신은 운동화는 너덜너덜 더러워지는 게 금방 곧 재구매를 해야 할 정도가 되어버린다. 나는 이제 등산도, 삼만보를 걷는 해외 여행도 문제가 아니다.
극강의 편안함을 누려보니 일반 멋쟁이 단화는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된다. 예쁜 운동화를 발견해도 불편할 것 같으면 사지 못할 때가 많아 아쉬울 때도 많지만 어쩌겠는가, 발은 편하고 볼 일이다! 오히려 빠른 유행에 민감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지갑은 웃는다.
발의 사정에 대해 적고 보니 나를 짊어지고 사느라 고생인 이 녀석이 꽤나 모진 풍파를 겪었겠구나 싶어 오늘 밤엔 괄사라도 해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발아, 너가 편해야 내 하루도 즐겁더라. 앞으로도 푹신하게 아껴줄게. 잘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