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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y 02. 2024

고통 없는 사람은 없다

[소설] <고통에 관하여> - 정보라

며칠 전 문학 작품을 읽고 토의하는 수업 시간이었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의 성장과 자기실현, 그리고 이상적 삶에 대해 신나게 토의했고, 자연스레 인물에 대한 관찰이 서로에 대한 관찰로 넘어간 순간이었다.     


“OO님은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시나요?”     


신기했다. 그간 여러 사람과 수차례의 토의를 해왔지만, 마지막 질문은 항상 이것이었다. 삶의 이유와 인생의 목적. 역시 모든 대화의 본질이자 불문율과도 같은 질문. 여담이지만 난 언제나 이 시간이 가장 설렌다. 타인의 삶을 티끌만이라도 훔쳐볼 수 있는 이 시간이.     


“단순하고 뻔하지만, 저는 행복을 위해 살아요. 그리고 그 행복을 위한 고통과 괴로움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요.”     


옆에 있는 다른 학우도 이에 공감하며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운동을 좋아하는데 운동을 한 뒤 자고 일어나면 제일 먼저 제 몸이 고통스러운지 확인해요. 그게 바로 성장했다는 증거거든요.”     


나는 그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가 말처럼 쉽게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고통은 정말로 우리를 성장시키는 게 맞을까?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행복’을 빼놓고 말할 수 있을까 싶다. 시대를 불문하고 대다수의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살 것이다. 나도 그렇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행을 목표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행복하지 않은 삶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까? 행복과 대척점에 있는 단어 중 가장 먼저 나의 머리를 스친 단어는‘고통’과 ‘괴로움’이었다. 정보라 작가의 장편 소설 <고통에 관하여>를 읽기 전까지는.




고통에 관하여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고통’에 관한 책이다. SF가 가미된 소설이고,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전개되지만, 그 어떤 서적보다도 고통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아마도 먼 미래, 어느 ‘제약회사’에서 만든 알약으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 약을 먹기만 하면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입혀도, 스스로 몸에 해를 끼쳐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기적의 약처럼 보이는 이 알약으로 인해 세상은 떠들썩해지지만, 사람들은 금세 이에 적응한다. 고통이라는 감정에 점차 무뎌지고, 인간의 기억 속에서 고통의 개념은 사라진다.     


그러던 중 인간의 고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단’이라는 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고통을 없애는 약의 성분을 조절하면 부작용으로 인해 고통을 다시 느끼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 약을 신도들과 함께 나누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때로는 자신의 몸에 칼을 대기도 하면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던 고통을 다시 되살리려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들은 끔찍하기만 한 고통을 느끼려고 하는 걸까.          

‘세상에 고통이 사라지자 인간은 다시 그것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고통없는 삶은 과연 행복할까?


인간은 절대로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다. 행복을 손에 쥐어도 더 큰 행복을 위해 다시 가시밭길을 걷는 존재며, 넘치는 사랑을 주고받아도, 더 큰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다. 때문에 인간은 불완전하며, 언제나 굶주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행복과 고통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학우분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행복을 위해 고통과 괴로움을 감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고통 뒤에 따르는 느껴지는 그 성취감은 때론 어떠한 희열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고통 없이 평생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과연 이 약을 먹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 누구도 이 빨간약을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책을 조금만 읽어보면 약을 먹기로 한 선택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초월한다는 것으로 보이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다시는 인간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은 너덜너덜하지만 고통은 느끼지 못하는 삶. 무언가 떠오르지 않나? 바로 좀비다. 고통을 덜 느끼는 것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자신의 몸이 썩어가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존재. 우리는 그것을 과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또한, 고통에는 육체적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육체적 고통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운 정신적 고통 역시 고통의 범주 안에 든다. 하지만, 이 알약은 불행히도 인간을 정신적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고통을 유발하는 슬픔과 괴로움, 불안과 우울 등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그 존재를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지 않은가.     


초월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대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P.228


그래서 나는 다시 고통을 느끼자고 주장하는 교단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둘 좀비가 되어가는 걸 보면 기적의 약보다는 악마의 약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교단이 한 행동처럼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가면서까지 작위적으로 고통을 만들고, 또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분명 잘못됐다. 행복을 위한 어느 정도의 고통은 분명 필요하지만, 자신의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행복을 바라는 '인간'이길 원한다면


앞서 학우분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에게 고통은 필수적이다. ‘인간’이길 원한다면, 그리고 행복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고통을 외면해선 안 된다. 고통과 괴로움은 행복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행복의 형상을 만들어주는 불빛이었다. 매일이 고통 없이 행복하기만을 꿈꿔왔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내가 바랐던 추상적 삶이 어쩌면 지옥일 수도 있겠구나. 고통받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그러니 우리 모두 고통과 행복의 냉/온탕을 적절히 넘나들며 살아가자. 고통스러울 땐 행복을 바라며, 행복할 땐 고통의 의미를 깨달으며, 그렇게 살아가자. 그리고 너무 멀고, 희미해 보이는 행복을 위해 매일 같이 고통받는 삶을 살지 말자. 행복은 잔인해서 손에 잡으면 형체가 사라지는 무지개와도 같은 잔인한 존재니.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 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P.289



아무리 팔에 힘이 없어도 코 앞의 행복을 붙잡기 위해선 팔을 들어 올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더 많은, 더 큰 행복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손을 들고 있어야 한다. 언제나 행복하고 싶다는 욕심은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폄하한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올 땐 팔을 내려야 한다. 때로는 눈앞의 행복을 포기하고 멀리 떠내려가는 행복의 빛을 넋 놓고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다시 눈앞에 나타난 행복을 바라보자. 팔에 조금의 힘이 생겼다는 그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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