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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y 11. 2024

치마 입는 남자

#4번째 단상 - 치마에 대하여


어버이날에 있었던 일이다.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가 맛있는 집밥을 먹고 어머니와 쇼핑을 나섰다. 여름이 다가와 우리는 편한 바지가 필요했고, 나는 몇 개의 옷가지를 들고 피팅룸으로 향했다.


“몇 벌 입어보시나요?”

“3개 입습니다.”

“...혹시 본인이 입으시는 건가요?”

“네?”

“그 치마요”

“아, 네. 제가 입습니다.”


내 손엔 런닝용 반바지 2개와 여성용 롱스커트가 있었다. 직원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나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며 서로 멋쩍게 웃었다. 매장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멀게만 느껴졌고 탈의실은 고요해졌다. 마치 서로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나는 애써 바스락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가끔 치마를 입는다. 대부분 치마처럼 보이는 ‘치마바지’이긴 하지만 남들이 물어보는 거에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아 그냥 치마라고 한다. 남자인데 왜 치마를 입냐고 물으면 나도 할 말이 없다. 그냥 이뻐서 입는다. 과거부터 남자는 치마를 입었다, 통기성이 좋다 등의 자질구레한 이유를 설명하기 싫다. 옷이라는 건 그냥 이쁘면 입는 게 아닌가.

치마 입고 등교하는 영국의 중학생들 / 출처 : SWNS


처음 치마바지를 입었을 때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흘끗, 덜 친한 사람들은 과장된 효과음과 함께 ‘개성있네~’, 친한 사람들은 ‘드디어 미친거냐’ 그리고 더욱 가까운 가족은 나를 나무랐다. ‘네 나이가 몇 살인데’ ‘제발 평범하게 좀 입어라’ ‘언제까지 이딴 식으로 입을 거냐?’’ 사이가 가까울수록 표현엔 진심이 담기고, 그 진심은 날카롭다. 이해받고 싶은 사람에게 되려 더 많은 상처를 받는다.


얼마 전 치마를 입고 학교에 등교한 날에 사회학 수업에서 ‘동조 효과’를 배웠다. “집단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개인의 태도와 행동은 달라집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세에 따르는 경향이 매우 커요. 다수에서 도태되는 걸 상당히 두려워하죠.” 치마를 입는 남자로서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행하는 옷 스타일과 브랜드는 ‘국룰’이라는 정답이 되어 패션을 획일화한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스타일을 인정하는 서양 국가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자기표현에 목숨을 거는 나에게 우리나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이 가득 한 동물원처럼 느껴진다.


패션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일차원적인 수단이다. ‘나 이런 사람이야’ ‘나 이런 거 좋아해’라고 말하거나 글을 쓰지 않아도 나를 표현할 수 있다. 네가 항상 차고 다니는 저 목걸이엔 사랑과 평화라는 신념이 담겨있구나. 비가 오는 날엔 항상 네모난 안경을 쓰는구나. 매일 신는 그 신발은 정말 많은 발자국을 찍어냈겠구나.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 묻고, 자신이 대답한다.


출처 : https://m.fashionn.com/board/read.php?table=column&number=21051


치마를 입기 전, 오늘 만날 사람들과 목적지를 생각한다. 나를 이해해 줄 사람들일까? 치마를 입어도 시선이 집중되지 않는 곳일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발 오늘은 욕지거리 듣지 않게 해주세요.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주세요.


패션은 자신감이라는데, 시작부터 불편한 시선과 함께하니 꽤나 주눅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읊조린다.


"역시 치마는 이쁘네. 괜찮을 거야. 자신감을 갖자. 나는 치마 입는 멋진 남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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