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번째 단상 - 더위에 대하여
올여름은 유독 더웠다. 체감상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실제로 지난해보다 더 뜨거운 여름이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 여름철 전국 평균기온은 25.6도로 역대 1위 기록을 세웠고, 평년 대비 3배에 가까운 20일의 열대야가 지속됐다. 대학교에 입학했을 2018년엔 흥에 겨워 당시의 폭염을 체감하지 못했지만, 졸업을 앞둔 지금은 햇빛의 따가움이 직격으로 느껴진다. 웃음기조차 메마르게 만든 여름이었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라도 무더위 앞에선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와 찝찝한 습기에 자연스레 미간이 한쪽으로 쏠린다. 뽀송하게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워도 금세 몸에 열이 올라 잠에 들기 어렵다. 이러니 길거리에서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을 찾기 힘들 수밖에. 평소 낙관으로 온몸을 무장한 친구를 만나도 하는 말은 똑같다. “날씨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나 집 가다 쓰러져도 그러려니 해라. 지옥도 여기보단 더 시원하겠다.”
평소 더위를 잘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내겐 올여름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여름에도 종종 긴 셔츠나 두터운 청바지를 즐겨 입었지만, 그럴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더웠으니까. 지난 글에서도 밝혔지만, 더울 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바로 냄새다. 혹시라도 내 땀 냄새가 누군가에게 불쾌함을 주진 않을까 사람을 피해 다닌다. 덕분에 이번 여름엔 거의 혼자였다.
더우니까 야외 활동을 기피하는 것 역시 내 삶에 큰 변화를 주었다. 원래라면 노을이 질 시간인 6시쯤 집을 나서 런닝을 하는데, 올 여름엔 8시가 되어서도 해가 쨍했다. 아무리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30도가 넘는 날씨에 땀에 흠뻑 젖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뛰는 날이 줄었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이른 낮이나 늦은 밤에 약속을 잡았고, 되도록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에서 시간을 보냈다. 당연한 결과로 삶의 루틴이 깨져 상실감에 빠졌고, 지독한 냉방병을 얻었다. 겨울보단 여름을 좋아했는데, 이젠 취소다.
주변 환경이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를 몸으로 체감하니 인간의 무력감이 배로 느껴진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하더라도 열대야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열심히 하려는 마음조차 시작부터 꺾이고, 더위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모든 일을 미룬다. 그러고 보니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은 시기도 폭염이 기승을 부린 때와 일치한다. 핑계도 참 구질구질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람이 아닌 태양을 탓할 수 있다는 것. 추석을 앞둔 이제야 상승곡선을 이루던 온도가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희미하게나마 주위 사람들의 표정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었고, 나 역시 긴장이 한층 풀린다. 여름 내내 입었던 반팔을 정리하고, 추절기 옷을 꺼내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다. 올여름은 유독 더웠으니까. 정신 건강에 도움 되는 합리화를 하며 더위로부터 삶을 되찾기로 한다. 이 또한 지나갔으니까 봐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