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트로츠키와 야생란』 - 이장욱(창비,2022)
요즘 들어 물건을 자주 잃어버린다. 기숙사에서 짐을 옮길 땐 에어팟을 잃어버렸고, 일주일 전엔 지하철에서 교통카드를 두고 내려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원래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성격이 아닌데, 최근엔 자주 무언가를 흘려보낸다. 몸 어딘가에 구멍이 났나. 아니면 마음에.
가장 자주 잃어버리는 물건은 립밤이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만큼 더욱 사이가 가까워져야 하건만... 당위성을 이유로 소중함이 결여된다. 립밤은 싸니까. 언제든 구할 수 있으니까. 책상 서랍에 같은 종류의 립밤이 박스째 구비되어 있다. 잃어버려도 금방 대체할 수 있다는 뻔뻔한 태도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립밤의 밑바닥을 본 적이 있었나. 가까운 관계의 종말은 항상 일방적이었다.
가장 잃어버리기 어려운 건 아무래도 관계가 아닐까. 기본적으로 정이 많은 성격이라 한 번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쉽게 끝을 내지 못한다. 이건 도저히 아니라는 생각에도 질질 끌고 가거나,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 하며 버텨낸다. 차라리 누군가 먼저 나를 잃어버려 줬으면 했던 적도 많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관계가 두렵다. 누군가는 끝을 고할 텐데 그게 내가 되어야만 하는 상황에 선을 끊어내지 못하면 어쩌지. 누구도 나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방어기제가 작동해 몸을 숨긴다. 관계는 립밤처럼 쉽게 살 수 없으니까. 책상 서랍에 꼭꼭 숨겨 놓을 수 없으니까.
잃어버린 사람들은 대체로 상실을 납득하지 못한다. 이장욱의 소설집 <트로츠키와 야생란>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단편 <잠수종과 독>의 공은 5년간 동거한 연인 현우를 잃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단순한 교통사고였다. 하지만, 공은 현우의 상실을 납득하지 못한다. ‘현우의 죽음으로 공의 생활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 되었다.(p.10)’ 신경외과 의사인 공의 환자는 얼마 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난동을 피우고 건물에서 뛰어내린 방화범이다. 사진작가 현우는 그 장면을 촬영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방화범과 현우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공은 방화범 때문에 현우를 잃었다. 마치 타인이 내 서랍 속 립밤을 훔쳐 간 것처럼.
그렇다고, 공은 생각하고 있었다. 부작용이 없으면 작용도 없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약리학도 배울 수 없고 사랑도 할 수 없고 인생을 이해할 수도 없다. p.34
단편 <귀 이야기>에 등장한 나의 당숙은 청력을 잃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자리 잡아야 할 곳에선 작은 나무가 자란다. 당숙은 과거에 잃어버린 자신의 친구를 만나야 한다고 하며 나와 나의 애인 ‘예수’와 함께 강원도로 향한다. 당숙의 친구는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희생된 소년 ‘이승복’이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은 어째서인지 말을 듣지 않고 어렵게 찾은 기념관에서도 당숙은 ‘내 친구는 여기 없다. 친구는 옛집에 있다(p.68)’고 말한다. 이승복이 당숙의 진짜 친구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숙이,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승복을 잃어버린 것은 확실하다. 가해자의 시체를 마주하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든 잃어버린 사람의 납득은 잃어버린 사람의 몫이다.
귀가 예민한 사람이니 위험을 감지했겠지만 그는 위험을 알고도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믿고 있다. 그렇게 믿지 않을 수가 없다. 파도가 높은 날의 그 물속에는 그에게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p.71
인생에서 가장 안타까운 상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곁에 있는 누군가의 상실은 충분한 애도와 시간을 거쳐 무뎌지지만, 스스로를 잃어버릴 경우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내 손이 뚫린 상태에선 그 무엇도 집지 못한다. <유명한 정희>에 등장한 ‘나’는 초등학교 친구 ‘정희’를 잃었다. 정희는 나의 초등학교 친구인데, 당시 서거한 대통령 ‘박정희’와 이름이 같았다. 나는 어째서인지 정희가 무서워져서 그와 거리를 둔다. 이후, 나는 삶을 ‘노선도에 따라 운행되는 기차(p.155)’처럼 느낀다. 나는 부모님의 권유로 의대에 진학하고, 어떠한 거부감도 느끼지 못한 채 인턴과 레지던트, 페이닥터를 거쳐 정보업체를 통해 만난 사람과 결혼을 한 뒤 신경정신과 의사가 된다.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느꼈으므로 10년 후나 20년 후의 내 모습을 거의 오차 없이 예상할 수 있었다. 얼굴, 표정, 옷차림, 게다가 출퇴근 시간까지. 자정 무렵 거실에 혼자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는 풍경까지. p.155
나는 정희를 제외한 그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텅 빈 물질덩어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병원에서 빼돌린 오피오이드가 아니면 삶을 이어 나갈 수 없을 때쯤 정희가 병원에 찾아온다. 살의를 느낀다고. 누가 나를 대신하는 것 같고 혼자가 아닌 느낌이 든다고. 정희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명확히 알 수 있다. 눈앞에 있는 건 내가 잃어버렸던 정희라고. 내가 정희를 잃어버렸을 시절, 사실 나는 개명을 했었다. 나의 이름은 원래 ‘정희’였고, 내가 잃어버린 것 역시 ‘정희’였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를 우리가 진실로 깊이 자각한다면 이 세상은… 벌써 천국이 되었거나…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p.171
잃어버리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려면 얼마나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립밤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에도 슬픔의 기간이 필요한데, 관계의 상실에선 얼마나 거대한 애도를 감당해야 하는가. 결국 모든 건 사라질 것이라는 초연한 태도로 살아가기엔 붙잡고 있는 게 너무 많다. 붙잡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설령, 놓아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근육의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뻔한 미래의 내 모습을 이 책에서 보았기 때문에. 과거의 내가 이 책에 살아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