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놀,2022)
제목만으로 끌리는 책이 있다. 일본문학은 좋아하지만, 추리소설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내게 나카무라 후미노리의『미궁』이 바로 그런 책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핑계로 도서관에 숨어 하루 종일 추리소설을 읽곤 했었는데, 그때의 죄책감 때문인지 추리 소설과는 점차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쨍한 연두빛 바탕에 흰 글자로 쓰인 미궁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긴 어려웠고, 오랜만에 이야기와 함께 미궁에 빠지고 싶었다. 일탈하는 마음가짐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주인공 신견(S)은 자신이 만들어 낸 가상의 존재 ‘R’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다. S는 이유 모를 사악한 감정과 가끔 몰려오는 일탈의 욕망을 모두 R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악한 면모를 부정한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었을 무렵,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게 된 S에게 더 이상 R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S는 세상을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렸다.
"그럭저럭 명랑해질 거야. 장래에는 뭐든 일을 하면서 여자도 사귀고 네 나름대로 이 따분한 세계 안에서 살아갈 거야. 다들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세계가 제시해 주는 다양한 인생 모델, 그중 어느 것 하나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겠지. (...) 그럭저럭 재미있을 거야. 아마도.“ P.11
미치고 싶지만, 미칠 수 없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이 있다. 평탄하고 아무 일도 없는 삶이지만, 평탄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괴로운 감정이다. 아무런 자극 없이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 내일도, 모레도, 1년 뒤의 하루도 예측 범위에 있음을 감지하면 인간은 무료함과 허탈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연스레 자극을 찾아 불길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그 뒤에 나온 구호는, 뻔한 귀결이지만, 일상을 사랑하라는 거야.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더라도 이 소소한 일상을 사랑하라는 거. 주위를 흉내 내면서. 어떤 이데올로기 속에든 들어가서 이 세계에 존재할 자격을 구비하고 싶었던 나는 혼란에 빠지게 됐어. 일상을 사랑하라고? 그건 너무 어렵잖아“ P.137
가끔 몰려오는 '일탈하고 싶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취하고 싶은 날. 생판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날.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쫄딱 젖고 싶은 날. 반복되는 일상에서 예상치 못한 자극은 인간에게 쾌락을 선사하며, 이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삶을 다채롭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일탈은 현실감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망가지고 싶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순 없다. 선을 넘고 싶어도 막상 선을 넘으면 불안을 떨쳐낼 수 없으며, 다시 안정적인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인생을 망쳐버릴 용기는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당신에게 새벽이 찾아온다면, 파티용 드레스를 벗고 회사에 출근할 양복을 주워 입을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의 직장을 그런 식으로 내팽개쳤다고 해도 내일부터는 다시 취직 활동을 할 것이다.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머리를 숙일 것이다. 인생을 망쳐버릴 용기도 없이, 사랑하지도 않는 내 인생을 계속 고집할 것이다. 평생 소중하게, 이 소소한 인생을 계속 고집할 것이다. P.173
주인공 S에게 이러한 일탈은 ‘위악’이다. 위악은 본심과는 다르게 일부러 악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S는 22년 전 발생한 미궁 살인사건의 범인이 자신이길 바랐으며, 그 사건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딸 ‘사나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과거에는 이러한 나답지 않은 모습을 모두 R의 탓으로 돌렸지만, 지금은 이러한 마음을 떠넘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S는 생각한다. 실은 R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S가 겪은 내적 혼란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일부러 반대되는 행동을 했을 때 느껴지는 묘한 쾌감의 실재는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배덕감’은 나쁜 일을 저지르고 후회하는 죄책감과는 다른데,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을 때 느끼는 해방감과 비슷한 감정이다. 배덕감은 단어의 생김새와 그 뜻 때문에 불량한 취급을 받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좋았던 거라고. 굳이 주위에 맞춰 나갈 필요도 없었고, 나 자신을 감출 필요도 없었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받아들이면 되었던 거라고. 내가 어떤 존재이건, 뭐가 어떻게 되건, 그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건 주위에 들킬 일이 없는, ‘밀실 속의 어두운 부분’이다. P.219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깊은 문학적 경험을 한 작가라 그런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악의 보편성과 일탈의 순기능은 이미 여러 작품 속에 드러난 주제지만, 거부감없이 이를 묘사하는 것 오직 작가의 실력에 달렸다. 악에 물들고 싶으면서도, 일상을 놓치기 싫어하는 S의 양가적인 모습에 동질감을 느껴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S와 사나에는 결혼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되지만, 중요한 건 삶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다. 삶이란 결국 하루하루가 똑같이 반복될 뿐임을 인정하며, 곁에 배우자가 있음에도 스스럼없이 “따분하네”라는 말을 내뱉는 그들은 어쩐지 세상일에 달관한 도인처럼 보인다. 물론, 일탈을 즐기는 그들에게 최고의 듀엣이 영원히 유지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와버렸으니 이제는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나 자신의 악덕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그녀와 한편이 될 수 있는 건 나 같은 존재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니까. P.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