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과 좋아하는 찜질방에 갔어요.
새로 시작한 필라테스 후 근육통을 달래는데 그만이더라고요.
게다가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불가마, 소금방, 황토방에 맛집인 식당도 있고요. 우리들의 놀이공원이랄까요?
어느 때보다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찜질방에 가서 첫 코스로 불가마를 선택해 수줍게 입장했어요.
저녁시간을 맞춰간 덕에 비교적 한가했죠.
"사람 없어서 너무 좋다~"
둘밖에 없는 불가마에서 애인과 킬킬거리며 속닥였어요.
뜨끈한 열기와 친밀한 사람과 나누는 편안함에 행복해졌어요.
문이 열리더니 두 여성이 들어왔어요.
한 여성이 말을 시작했어요.
"글쎄 며칠 전에 그 언니랑 투썸에 갔거든.
거기서 커피를 마시는데, 언니가 나한테 그러는 거야.
'야, 뒤돌아보지 말고 내 말 들어봐. 네 뒤에 앉은 애들, 여자애들인데 서로 뽀뽀하고 껴안고 ㅈㄹ이다.' 이러지 뭐야."
얘기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지나갔어요.
'우리 둘을 알아본 걸까? 정색하고 뭐라고 해줄까? 망신을 줄까? 머리채를 잡을까? 나가서 불가마 문을 잠글까?'
짧은 순간 끔찍한 생각들이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어요. (관찰을 했네요. 그게 가능했어요. 비폭력대화를 공부한 덕이지요…)
내 마음을 들여다봤죠. 나는 불안했고, 긴장했고, 슬펐고, 두려웠더라고요. (느낌을 찾았어요.)
나에게는 애인과의 평온한 찜질방 놀이가 주는 재미와 충만함이 중요하고, 누군가의 혐오나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부터 안전하기를 바라고, 내 일상이 평화롭게 유지되는 것이 중요했어요. (욕구를 찾았네요.)
욕구까지 찾아내자 부글부글 끓어 넘칠 것만 같던 머리와 마음이 가라앉았어요.
그리고 불가마에 머물며 두 여성의 이야기를 좀 더 듣기로 했어요. (나 자신에게 하는 부탁이었죠.)
"근데 여자끼리는 깨끗하다더라고."
한 여성의 얘기를 들은 상대 여성이 이렇게 대답했어요. 좀 웃겼어요.
'레즈비언 관계를 옹호하려는 건가? 위생이 중요한 건가?'
"아유 깨끗한 건 모르겠고,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여자들끼리 그래? 징그러워~"
"내가 옛날에 다니던 미용실에 그런 사람이 있었잖아. 여자 둘이 사는데 한 명은 아주 딱 남자 같아. 미용사가 그렇게 그 남자역하는 사람을 잘 챙겨주더라고. 신발도 깨끗하게 닦아주고, 양복도 넥타이도 딱 입혀가지고. 그렇게 자랑스러워해. 둘이 숨기 지를 않더라고. 한국에서 최초로 결혼했대. 신문기사에도 났다더라고. 아주 둘이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자랑스러운가 봐. 걔가 머리를 그렇게 잘했어. 그러니까 미용실 주인도 뭐라고 못하지 뭐."
얘기가 이렇게 되니 '혹시 저이는 혐오에 저렇게 대응하는 건가? 혐오에 맞서는 고도의 전략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음이 점점 누그러졌어요. 감사한 마음도 들었어요.
투썸에서 키스하던 그 여고생 커플에게,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결혼을 한 그 커플에게, 그리고 그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좀 웃기는 대화지만 뭔가 훈훈하게 얘기를 끌어가 불가마 여성2에게 말이에요.
불가마를 나와 다시 둘이 된 우리 커플은 킬킬거리며 아까 그 상황을 돌아봤어요.
두려움에 사로 잡히거나, 분노로 이성을 놓지 않고 웃음으로 그 상황을 대하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우리 자신에게 축하와 감사가 있어요. 함께 부단히 노력하고 스스로를 돌봐온 지난 23년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었겠죠.
"내가 뭐라 할걸 그랬나? '어머머머~ 내가 그런 동성애자잖아~ 처음 봤어? 아유 우리 같은 사람도 좀 살아야지잉~ 호호호호~!' 이랬으면 어땠을까? 불가마 커밍아웃 ㅋㅋㅋ"
그러자 애인이 웃으며 말했어요.
"아냐 이 찜질방에서 주목받는 거 싫으니까 그러지 말자. ㅋㅋ"
그래요.
나는 그런 여유도 생겼어요.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우리 둘을 위해 어떤 상황에서는 커밍아웃을 참는 그런 여유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찜질방 불가마에서 5분 후면 헤어질 그런 이들에게까지 커밍아웃하지 않기를 흔쾌히 선택하는 그런 여유요.
암튼 비폭력대화 덕분에 저는 누군가의 목숨을 살렸어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범죄가 연일 뉴스로 들리는 상황이라 이런 표현을 쓰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이성애중심주의 가득한 세상에서 일상적인 혐오를 경험하는 중년 갱년기 레즈비언의 넘실대는 분노를 표현하고자 감추거나 에둘러 표현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 둘도 구원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