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들지 않는 여자.

말레피센트

by 돌터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심당 딸기 생크림 케이크^^



예약 배송 주문했던 케이크가 왔다. 딩동~~ 소리에 우리 집 말티 양은 미친 듯이 두다다닥 현관으로 달려간다. 가만있어봐. 내가 먼저 탐색할게 말하는 것 같다. 말티 양이 굳은 얼굴로 현관문 앞에서 냄새를 맡는다. 미리 문자로 케이크가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나는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오예. 생크림 생크림...



한가할 때는 집에서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어 먹는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여느 가게에 파는 케이크는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 생크림을 만들 때는 설탕을 전혀 넣지 않는다. 다 만들고 시럽은 빼고 생과일만 얹거나 다크 초콜릿을 거칠게 갈아 후두둑 뿌려 먹는다. 기분이 굉장히 좋아진다. 가끔 너무 울적한 날에는 성심당 케이크를 주문한다. 배달된 케이크를 눈 앞에 두고 "어머 오늘이 무슨 날 같다." 천연덕스럽게 선물 받은 듯 기뻐한다. 물론 내 카드로 산 것이지만.


케이크로 해결이 안 될 만큼 힘들어질 땐 산에 간다. 집 근처 높지 않은 산으로 출발한다.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산책 삼아 산을 오른다. 산을 다 돌아도 2시간이면 충분하니까 힘들지도 않다. 산 중턱에 작은 절도 하나 있고 빨간 바가지가 매여있는 약수터도 나온다. 어렸을 때는 저 빨간 바가지로 물도 마신 기억이 난다.

지금은 졸졸졸 나오는 약숫물 옆에 라돈 수치가 우려되니 먹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다. 이제는 관상용이 되어버린 약숫물에 살짝 손을 적시며 싱긋 웃어본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려? 과학이. 문명이 이렇다. 칫.



나는 그렇게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사람이다. 일 년에 몇 번 케이크를 먹으면 기분이 풀리고 아무리 화가 나도 차에 태워 산이나 숲 속에 데려다 놓으면 금방 헤벌쭉 해진다. 때마다 반지를 선물하지 않아도 기념일마다 꽃다발이 없어도 아무 불만이 없다. 내 생일은 나 스스로 선물을 주고 조용히 즐긴다. 사람들 모아놓고 축하받는 건 좀 꺼려진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그 아름답고 소중한 날의 기운을 오롯이 나 혼자 만끽하고 싶다.

떠들썩하게 모인 사람들이 모두 백 퍼센트 내 탄생을 축하할 거라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다 각자 사는 인생인데 너의 생일이 내 인생에 뭐 이렇게 파안대소할 일이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기분이 찝찝할 것 같다. 마치 초대하지 않은 말레피센트가 몰래 끼어들어와 축복인 양 어떤 저주를 내리고 있을지 알게 뭔가.

피해망상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초대받은 그 누군가의 생일에 떨떠름한 적이 솔직히 몇 번 있었다. 매년 찾아오는 생일. 뭐 이렇게 파티씩이나. 그냥 환갑이나 칠순이나 챙기지 했던 불량한 마음을 살짝 고백해본다.


아무튼 내 음력 생일은 아무도 안 가르쳐주고 나 혼자 만끽하고 있다. 그 누구의 축복도 저주도 없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빠졌지만 아무튼 난 돈이 별로 들지 않는 여자다. 난 좁은 비행기 좌석도 싫은 사람이고 굳이 비싼 옷을 입지 않아도 직각어깨 딱! 허리 딱! 체대생 분위기가 나는 여자니까. (자기애성 인격 장.... 닥쳐!)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은


어스름한 저녁. 시장통 어딘가 소문난 막걸릿집 낡은 의자에 걸터앉아 대충 파전을 찢어 놓으며 마주 앉아 막걸리잔을 비우는 것.


산 하나를 쉬엄쉬엄 오른 뒤 촌스럽게 가방에 싸온 보온병을 꺼내고 바위에 걸터앉아 마주 보고 커피를 마시는 것.


역전 커다란 재래시장에 사이좋게 손 붙잡고 구경 다니다가 내가 좋아하는 상추랑 시금치가 보이면 --할머니. 속에서 주세요. 속에서. 이그. 그냥 다 담으셔. 다 살게요-- 한 보따리 사서 들고 오는 것.


저녁 늦게 소파에 나란히 앉아 티브이를 보면서 가만가만 지친 그 등짝을 주물러주는 것.


고작 이 정도가 전부다. 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해 볼 수 없는 일들. 내 어느 생일날 말레피센트가 몰래 숨어 들어와 뺏어간 나의 연인이여. 나를 기억하기를. 아무것도 필요 없는 내가 여기 있으니 그저 빈손으로 터벅터벅 걸어오기만 하기를.




우울합니까?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케이크를 바라봅니다. 빠져듭니다. 자 한 입 먹어볼까요.

새해 첫날 배송된 케이크와 함께 떡눈이 내린다. 케이크를 예약할 때는 새해 첫날 눈이 올지 몰랐다. 초대하지 않았던 저 희고 큰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우수수 내려오고 있다.

어쩌면 그가 보내준 선물일지 몰라.

나를 축복하려고. 나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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