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국어 시간에 어쩌다가 강아지를 키우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키워본 적 있냐고 묻기에, 강아지를 키우다가 귀찮아서 버렸다고 대답했다.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것’을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하려고 일부러 말해본 것이다.
예상대로 아이들이 강아지를 버리는 일에 대해서 비판을 쏟아내었다.
“강아지를 버린 게 아니라 자유를 준 겁니다.” 라고 해도
“강아지가 굶을 수도 있고 차에 치일 수도 있잖아요.” 하면서 그런 행동을 합리화하는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이 강아지를 위한 일인지, 나를 위한 일인지 생각해 보세요. 집안에 갇혀서 사료와 물만 먹으면서 지내다가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것이 그 개가 원하는 삶일까요? 굶을 수도 있고 차에 치일 수도 있는 바깥에서 하루만이라도 자유롭게 살다가 죽는 것이 그 개가 원하는 삶일까요? 여러분도 혹시 집에서 주는 밥만 먹고 학교에서 주는 공부만 하면서 애완동물처럼 갇혀 살고 있는 건 아닌가요? 험난한 바깥 세상에서 진정한 자기의 삶을 스스로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들판의 배고픈 개가 집에 묶여 있는 배부른 개를 부러워하지 않는 이야기는 <이솝우화>에서 나오고 <장자>에도 나온다. 그러나 전달하려던 교훈은 이미 사라지고 선생님이 막말을 한다, 개랑 인간이랑 같냐, 이미 길들여진 개는 원래부터 야생에 살던 개와 다르다 등등의 말로 아이들은 저마다 분노를 표현했다.
수업이 끝나고 예지가 옆 반의 하늘이한테 말했다.
“이제 저 쌤한테 실망해서 거리를 둬야 되겠다.”
하늘이뿐만 아니라 만나는 아이들마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에게까지 내가 막말을 했다고 일러바쳤다.
재욱이가 말했다.
“선생님, 말 한마디 잘못해서 왕따가 되게 생겼네요.”
물론 나는 길에서 고양이에게 참치캔을 사준 적도 있고 마당이 있는 집에 살 때는 마당까지 따라온 고양이를 집에서 기른 적도 있다. 단체로 등산을 갔을 때는 가방에 담긴 채로 산 속에 버려진 강아지의 주인을 찾아주려고 경찰서와 동사무소로 왔다갔다 하느라 저녁 회식에 빠진 적도 있다. 그런데 키우던 개를 안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자유를 뺏지 않는 것 아닐까? 요샌 개를 못버리게 하려고 등록칩까지 박는다고 한다. 누구를 위해서? 그러나 애초에 교훈을 주려고 했으면 ‘강아지를 버리자’가 아니라 ‘강아지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자’로 말을 꺼냈어야 하는 거였다. 아이들이 실망해서 거리를 둔다거나 재욱이 말대로 왕따가 되는 건 너무 슬퍼서 강아지를 버린 일이 없다고 변명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차가웠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잖아요.”
지난 수업에서 자서전을 위한 인터뷰 질문 중에 “너무 진지해서 농담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 있나요?”가 있었는데, 아이들에게는 반려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농담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 중 하나였나 보다. 말조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울하고 슬프고 미안한 하루였다. 자업자득이니 슬퍼할 자격도 없다는 생각에 더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