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라고, 그러든지, 그럴 수 있지"
세상살이에 정답이 있을까?
모든 상황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1+1=2만큼 명백한 하나의 답은 당연히 없다.
그러나 모범답안은 있다.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하고, 업무를 일목요연하게 처리하는 상호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그 틀 밖의 행위를 우리는 '뻔뻔하다'라고 규정한다. 실제로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염치없이 태연하다'로, 부정적 뉘앙스가 다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뻔뻔함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뻔뻔함의 구역은 상당히 넓으며, 이에 대한 개인의 인식 차이는 2025년 기준 대한민국의 여름과 겨울 온도 차이만큼 크다. 누군가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이 또 다른 이에게는 토네이도급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뻔뻔함 역치가 매우 낮은 사람이었다(그렇다, 과거형이다). 말 한마디에 그날의 대화 전체를 복기하면서 장면을 모아 영화 한 편쯤 뚝딱 찍어내는 사람이었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그러면 덜 억울하기라도 하지. 주변의 온갖 분위기를 감지하고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라며 신경을 곤두세워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신이 말짱한 게 더 신기할 정도다.
우울의 시간을 통과하며, 마음에 세 가지 문장을 새겨 넣었다.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처받는 짓은 관두기로 했다. 상대의 마음과 말은 그 사람의 몫. 나는 나의 몫에 집중하기로 했다. 피드백은 영양가 있는 부분만 삼키고, 그 외에는 퉤.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관대함을 적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하게도 쉽지 않았다. 예민하게 분위기를 감지하고, 나에 집중하며, 피드백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삼십 년 넘도록 몸에 밴 습관이었으니까. 여전히 남 탓은 어색하고, 내 탓은 자연스러웠으며, 사소한 실수에도 무너졌다.
잘못했을 땐 '뭐? 그럴 수도 있지.'
누가 뭐라고 하면 '어쩌라고.'
타인의 목소리를 빌린 자기비판(혹은 진짜 비난) 때는 '그러든지.'
노력으로 안 되는 건 없다.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나는 달라지고 있다. 이 변화가 긍정적이기만 한지는 모르겠다. 누군가는 "쟤 왜 저래?"라고 할 수도 있고, 본의 아니게 상처받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놀랍게 좋다. 와... 세상 사는 게 이렇게 마음 편할 수도 있는 거였나? (나를 3년 넘게 보고 있는 상담선생님이 아직 더 뻔뻔해져도 된다고 말한다는 지점에서 2차 놀람. 다들 이거보다 더 마음 편히 살고 있는 건가!)
예전엔 뻔뻔한 걸 나쁘다고 생각했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거라고. 내 욕구는 자제하는 게 맞다며 스스로를 낮췄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그런 모습을 '호구'라 부르기로 잠정 약속한 듯싶다. 그래서 나도 호구를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하고 싶은 말 하고, 실수도 하고, 좀 제멋대로 굴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문제는 생겼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늘 있었다.
비단 나뿐만은 아닐 거다. 이렇게 자기 검열 심하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규칙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안 그래도 힘든 세상, 너까지 스스로에게 벌주지 마. 잘못한 건 배우고 고치면 돼. 비판은 수용하고 비난은 걷어차버려. 세상이 뭐 같을 땐 이렇게 말해봐, 어쩌라고."
좀 뻔뻔해져도 세상 안 무너진다. 미세한 균열조차 안 생기니, 부디 마음 가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