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들어오는 바람이 냉장고 문 열 때보다 더 차가워 깜짝 놀랐다. 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인데 지난밤 갑자기 찾아온 초조한 마음에 잠 못 들고 노트북 앞에서 서성대느라 몸도 마음도 지뿌둥하다. 안 그랬으면 좋았을 걸 후회가 밀려온다.
지나간 주말을 돌이켜보니 금요일 저녁은 분명 축제였다. 조금 일찍 퇴근한 남편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평소 같았으면 이른 저녁을 먹고 코스트코에 가는 게 우리 부부의 일상이지만 나와 큰 아이가 목요일에 맞은 코로나 2차 백신 후유증 때문에 그냥 다 같이 거실에서 뒹굴며 TV를 봤다. 남편은 소파와 한 몸이 되는 걸 즐기는 점액질형 인간인데, 그래도 막내가 던지는 인형을 받고 다시 던져주는 정도의 성의를 보여주어 얼핏 보면 아주 그럴듯하게 가정적인 남편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의 손엔 그가 너무도 사랑하는 판타지 소설이 가득 담긴 패드가 꼭 쥐어 있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가 있나? 그는 심지어 유익하다고 하니 뭐 그렇다고 치자. 하긴 내가 쓰는 걸로 내 마른 마음에 물을 뿌리듯, 그는 읽음으로 쉼을 얻는 모양이다. 결혼하기 전 그는 나에게 자신의 꿈이 만화방 주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만화방 주인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일을 하고 있다!
토요일이 되고 내 컨디션이 회복되자 남편이 코스트코에 가고 싶다고 한다. 주말이라 붐빌 그곳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따라나섰다. 어딜 가고 싶다고 해도 갈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니 점점 무기력해진다. 그래도 그 와중에 어딜 가고 싶다는 것도 긍정적이고 또 그곳이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함께 간 코스트코에서 남편과 함께 아이들이 신을 목이 긴 겨울용 양말이나 만몇 천 원짜리 겨울 실내화 같은 걸 장만했는데, 이게 뭐라고 재미가 있다. 월동준비를 한 기분이랄까.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 막내를 산에 데리고 갈 때 입히면 딱 좋을 기능성 상하복을 카트에 담고 뿌듯했다. 우리가 산 것들 중 제일 비싼 건 삼겹살 한 판. 썰어서 팩에 담긴 건 100g당 200원이 넘었는데, 한 판 그대로 비닐 포장된 건 100g 당 176원이길래 남편이 자기가 정육점 사장님처럼 썰어주겠다고 해서 카트에 툭 던져 넣었다. 근데 그게 구만원이 넘는 바람에 지불해야 할 총액이 꽤 많이 나온 거다. 코스트코가 그렇지. 싸다고 막 담다 보면 몇십만 원 훌쩍 넘기는 게 한 순간이다. 결제를 할 때 왠지 남편의 눈치를 보게 된다. 물론 안 그래도 된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돈을 벌지 않으니 그런 마음이 생긴다. 내가 돈을 힘들게 벌어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건가? 남편이 얼마나 힘들지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간다. 공감 능력이 유달리 월등(?)한 나는 그가 느끼는 가족 부양의 책임감을 그와 동급으로 느끼기도 해 지병인 불안증이 더 깊어진 적도 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를 믿고 편안하게 사는 게 그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문득 죄책감이 든다. 그가 느끼는 가족부양의 책임감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일요일인 어제 우리 가족은 일산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큰 아이는 2차 백신 접종 후 열까지 많이 났는데, 다행히 잘 회복해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감사한 시간이었다. 모네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호수의 연꽃과 수양버들이 이제 가을이라고 알려준다. 걷다 보니 갑자기 핑크빛 물결이다. 시선을 빼앗겨 다가가 보니 TV에서 본 바로 그 핑크 뮬리 란다. 그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화사하게 웃는 두 아이를 보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저 아이들을 키우던 그 시절, 왜 내 마음은 이 호수처럼 잔잔하지 못했던 걸까. 누군가 나에게 네가 지금 하는 일이 진짜 엄청나게 힘든 일인데, 그래도 잘 참고 견뎌낸다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행복을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그땐 그 말이 귀에 안 들어왔을까? 해는 뉘엿뉘엿 떨어지고 호수를 가득 채우며 빛나는 노을에 들뜬 마음이 가라앉으며 왠지 모를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런데 시선을 돌려 멀찌감치 서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나랑 똑같은 거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일 출근에 대한 부담감 때문일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피곤한 지 잠깐 잠이 들었다. 나는 운전을 하며 음악을 틀었는데, 조금 빠른 비트의 음악이 나왔다. 이상했다. 다음다음, 막 눌러 좀 느린 음악으로 바꿨는데 그래도 차 안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바로 꺼버리면 확 조용해지는 게 더 숨 막힐 거 같아 그나마 느린 음악을 억지로 꾸역꾸역 들으며 생각했다. 일요일 오후 우울하고 피곤한 가족이 탄 차 안에서 흘러나오면 좋을 음악이 세상에 있을까?
월요일 아침, 남편이 출근을 했다. 서성대느라 늦게 잔 나보다 먼저 일어나 혼자서 사과를 씻고 썰어 먹으며 그렇게 출근 준비를 잘했다. 오늘따라 왁스 발을 잘 받은 곱슬 머리카락이 적절하게 힘을 받아 휘몰아쳐 아주 봐줄 만했다. 아이들의 겨울 양말과 아내의 털 실내화를 사놓고 삼겹살 한 판을 정육점 사장님처럼 칼을 쓱쓱 갈아 썰어준 다음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과 함께 잠깐의 쉼을 누린 후 일요일 저녁노을과 함께 찾아온 우울한 마음을 극복하고 월요일 아침, 그는 다시 회사로 출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