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분노엔 오래된 사연이 있다.
매주 화요일은 재활용 수거하는 날이다. 지난번 수거일이 명절 연휴와 겹쳐 내가지 못하는 바람에 오늘 나가야 할 재활용품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평소 같으면 둘째 아이가 어린 시절 타던 유모차에 박스들을 싣고, 비닐봉지 가득 채워 손잡이에 걸면 한 번에 다 처리가 됐었는데 이번에는 안될 거 같다. 4인 가족이 2주간 먹고 산 흔적이 이렇게 산더미라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해 한숨이 나온다. 나는 평생 가보지도 못할 태평양 어디 무인도 근처에서 500년 후에 발견되고 그러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골이 무지 아프다. 억지로 정리를 해 1차로 나갈 준비를 마치고 보니 현관 구석에 낯선 종이가방이 있다. 이건 또 뭔가? 오래전 마트에서 산 과자가 담긴 봉지들이다. 이거 이거... 내가 사지 말라고 그토록 반대를 했던 그 과자다. 남편은 이 과자만큼은 꼭 먹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나는 그 딱딱한 걸 누가 먹냐며 사지 말라했지만 남편은 무슨 오기가 났는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옥신각신하는 게 볼썽사나운 거 같아 결국 아량을 베풀었다.
"그래, 사라 사."
역시나 내 예상대로 박스에 가득 담긴 열 봉이 넘는 그 과자들 중 딱 한 봉지? 아니 겨우 두 봉지를 먹은 후
아무도 더 이상 그 과자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오래도록 부엌 수납장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림을 정리하던 중 그 문제의 과자 봉지들이 발견이 됐고, 다행히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았길래 이걸 관리실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라도 드려서 소진을 시키면 어떨까? 했지만 너무 맛있어 죽겠는 걸 드리는 게 아니라는 게 마음에 걸려 실행도 못했다. 결국 저렇게 현관 한쪽에 방치됐다가 잊힌 것이다. 이젠 유통기한마저 지나버렸다. 억지로 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홀랑 버리기도 아깝고, 도대체 이 과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 보니 갑자기 짜증이 올라온다. 먹지도 않을 걸 왜 사자고 했나. 부글부글
재활용을 내다 놓고 올라오니 허기가 진다. 간단히 시리얼을 먹을까 하고 찾아보니 못 보던 오트밀 상자
세 개가 눈에 띈다. 동서식품, 켈로그, 퀘이커도 아닌 완전 처음 보는 어떤 브랜드인데 뭔가 분위기가 엄청 세련돼 보이는 거다. 기억이 났다. 전에 큰 아이가 애플 어쩌고 오트밀이라며 과일 같은 걸 썰어 넣고 죽 같은 걸 만들어 먹는데 한눈에 봐도 이게 쉽게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아무튼 큰 아이는 어려서부터 몸에 좋은 거 먹길 그렇게 좋아했다. 그러니 또 무슨 유명 건강 유투버의 추천을 믿고 이 오트밀을 주문한 모양이었다. 내가 보고 있으니 맛없다는 말도 못 하고 우물우물 억지로 먹다가 결국 도저히 못 먹겠다며 포기한 그 오트밀! 근데 이게 세 박스나 있었다고?
"야, 이게 왜 세 박스가 있니? 언니가 이거 다 주문한 거야?"
"응 엄마, 언니가 주문했어!"
"야!!! 안 먹어 본 거면, 그냥 한 통이나 주문해 맛부터 볼 것이지 이걸 무슨 세 통이나 주문을 해!
네가 무슨 여배우냐?! 기네스 펠트로 야! 너 전에 코스트코 갔다가 유리병에 든 무슨 액상 티 사겠다고
난리 쳐서 사 온 거! 너 그거 몇 번이나 먹었어? 냉장고 열 때마다 그 무거운 병 덜그덕거려
얼마나 짜증 나는지 알아? 유통기한 지나려면 한참 남았을 텐데, 우리가 무슨 카페를 하니?
차를 마시면 얼마나 마신다고 그걸 사! 엄마가 사지 말라는 건 사지 말아야지!
먹지도 않을 것들을 사서 집에 쌓아두고. 결국은 엄마가 다 처리하고...
저 비닐봉지에 유리병에 박스에.. 이거 다 지구 고통 주는 쓰레기 아니야? 맨날 지구 사랑하자며,
너는 지구를 말로만 사랑하니!"
자다가 엄마 꽥꽥 소리에 놀라 일어난 큰 아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나 눈을 비빈다. 남편의 과자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짜증이 오트밀까지 이어지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결국 꽥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눈치를 보던 둘째 아이가 자기 학교 갈 시간이라며 내 손을 잡아 끈다. 타오른 마음의 분노는 잦아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니 씩씩거리며 둘째 아이의 무거운 책가방을 어깨에 턱 메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바로 앞 집 아저씨가 자전거를 조립하고 있다. 며칠 째 국적을 알 수 없는 박스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커다란 상자가 문 앞에 있더니 그게 자전거 부품이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며 툭 튀어나온 나를 보자 왠지 겁에 질린 얼굴이다. 급히 톤을 바꿔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방금 전 꽥꽥대던 내 목소리를 듣던 아저씨에게 이 공손한 인사가 얼마나 가식적으로 들렸을지 너무나도 뻔한 상황이다. 에라 모르겠다. 망했다 싶은 심정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몇 걸음을 떼니 이번에는 근처 중학교의 생활복을 입은 여학생이 있다. 저 아이의 남동생이 우리 둘째랑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 아이와는 이 동네에서 세상 착한 아줌마 버전으로 다정한 인사를 나누기도 했었는데. 중학생은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 표정의 큰 변화 없이 나에게 간단한 목례를 해준다. 얼마나 착한 아이인가. 나는 부끄러웠다. 그 창피한 마음을 그대로 얼굴에 담아 인사를 했다.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의 분노 폭발이 무슨 대수인가. 그동안 엄마로, 아내로 살며 얼마나 꽥꽥 댔던 가 말이다. 창피해하는 것도 이상하다. 큰 아이 초등학교 1학 즈음엔 용산에 살았는데 앞 집에 주한 미국 군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이유로 꽥꽥 소리를 지르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그 집 아저씨와 딱 마주친 거다. 그에게는 다섯 살 여섯 살 즈음된 어린 딸들이 몇 명 있었는데, 내가 너무 창피해하자 웃음을 띄며 나에게도 비슷한 아이들이 있다는 둥... 알아듣지 못할 나를 배려해 아주 간단한 영어로 말을 건넸다. 머리카락, 눈동자 색깔이 다른 그들도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구나. 십 년 전인 그때도 꽥꽥 댔는데 뭐 지금 이런 게 무슨 대수라고. 나는 원래 이렇다! 다들 이러고 살지 뭐. 안 그래? 꽥꽥!
언제였나? 가족과 함께 코스트코에 가서 장을 보고 지상 1층으로 카트를 밀며 올라오는데 거기 바로 환불과 카드 발급을 해주는 곳이 난리가 난 것이다. 오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 고객이 직원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 갑질의 여왕이 된 이 아주머니를 아주 끔찍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쩔쩔매는 직원이 불쌍해 보이긴 했다. 40대 정도의 남자였는데, 완전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 아주머니 고객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을 그냥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안타까워 그냥 가자는 가족들의 손을 뿌리치고 거기 서서 그 아주머니가 쏟아내는 말을 꼼꼼하게 들어봤다.
남편과 함께 장을 보러 온 이 분은 외부 주차장에 차를 댔고 코스트코의 주차 확인 도장이 없이도 차를 뺄 수 있다는 이 직원의 안내를 받고 그냥 간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주차장을 나오는데 영수증 도장을 보여달라는 주차요원의 요구를 받았고 차단기는 올라가지 않는데 뒤에 차들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며 운전하는 남편은 짜증이 났고, 자신은 급히 도장을 받으러 다시 여기까지 뛰어왔다는 것. 왜 일을 이렇게 하냐고 그 직원에게 하소연과 분노 폭발 그 어디쯤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분의 남편이 얼마나 짜증을 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 열리지 않는 차단기 앞에서 운전대를 잡고 전진도 후진도 못한다면, 게다가 이건 만약인데 바로 뒤차에 성격 급한 운전자가 빨리 나가라고 빵빵이라도 했다면! 이건 정말 특히 남자들에게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 상황이다. 무던하다는 소리를 듣는 남편이지만 만약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분명 엄청나게 짜증을 내며 왜 주차 확인 도장을 받아오지 않았냐고 나에게 짜증을 냈을 것이다. 또 나는 말하겠지. 거기 직원이 그냥 가라고 했다고 내 잘못은 아니라고. 그러면서 상황은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달았을 터.
늘 느끼는 거지만, 솔직히 코스트코 직원들은 사실 그렇게 친절하지 않은 편이다. 우리는 제품을 팔지, 서비스는 팔지 않아요! 그런 느낌이다. 코스트코는 계산을 하고 나오며 영수증 체크를 받는 과정이 있는데 얼마 전 내 또래의 어떤 여직원이 내 영수증에 하트를 그려준 것이다. 20년 넘게 코스트코를 다녀도 하트 받은 건 진짜 처음이었다. 뭐지? 이 낯선 친절함? 20년에 한 번 열리는 영수증 하트 이벤트에 당첨이라도 된 건가? 기분이 좋아 그 직원과 가벼운 스몰 토크를 하며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던 기억이 있다. 희귀한 체험이었다. 불행히도 아주머니의 불만과 짜증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 직원은 하트를 그려줄 만한 친절맨도 아닌 모양이다. 심지어 밀려드는 고객을 상대하며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보니 일부 고객의 신경질 따위에 배려 넘치는 공감 같은 걸 해줄 마음의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말도 안 통하게 열 받은 아줌마의 짜증 폭탄을 받았으니 또 얼마나 힘이 들까.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주변이 모든 시선은 그 직원을 응원하고 있었고
화를 내던 그 중년의 아주머니 고객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그 무시무시한 시선을 느끼고는 자신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설명하고 또 설명하다가 결국 안 되겠는지 멈추고 돌아서며 그 상황은 종료가 됐다.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며 딸아이가 내 팔을 잡아 끈다.
"엄마 이제 그만 가자!"
"나라도... 저 아주머니를 봐줘야 할 거 같단 말이야. 저 마음은 나밖에 모를 거 같아."
"그렇긴 하지. 엄마도 화가 많이 나긴 하지... 흠흠 "
예전에는 시어머니한테 서운한 마음이 많았다. 며느리인 나를 살갑게 대해 주지 않으시는 거, 그게 그렇게 싫었다. 힘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어머님을 향한 아버님의 말투가 지나치게 퉁명스러운 거다. 우리에겐 늘 시어머니의 음식이며 말씀 없는 거, 심지어 현모양처라며 자랑을 하시면서도 습관처럼 어머님의 기를 꺾으시는 거다. 어머님이 안쓰러웠다. 아버님의 그런 성향이 남편의 유전자 어디 숨어있었나 남편도 종종 비슷하게 내 기를 꺾는다. 자기가 무슨 김은숙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나를 쥐어박는 거다. 설마 이걸 애정표현이라고 하는 건가? 그래서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해줬다. 너는 현빈이 아니다! 드라마 흉내 내지 말고, 이상하게 쥐어박지 말고 제발 그놈의 공감을 좀 하라고, 무슨 말을 하면 대꾸를 빨리 좀 하라고! 그렇게 20년째 싸우고 있다. 그나마 큰 딸이 성인이 되어 함께 싸워주니 남편이 예전보다는 빨리 승복을 하고 정신을 차리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주 한참 남았다.
나의 시어머니를 생각하고 또 나를 생각하면 왠지 코스트코에서 분노를 참지 못한 그 중년의 아주머니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거기에 여성 호르몬, 요 녀석들까지 말썽이니 어떻게 버티냔 말이다. 이건 어쩌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조짐은 이미 충분하지 않나!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난 중년의 그녀를 보면 빨리 공감하고 이해해주세요. 제가 장담하는데 그 화는 작은 공감과 이해만 있다면 봄눈 녹듯 금방 사라집니다. 그녀는 정말 오랫동안 힘들었거든요, 삼시 세 끼를 수만 번, 빨래와 정리는 수십만 번. 남편은 그녀의 고충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 엄마보다 편하게 산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죠. 며느리 노릇은 얼마나 고됐을까요? 제사에 명절에 그녀가 부친 전들을 쫙 줄 세우면 지구 한 바퀴가 될지도 몰라요. 도대체 왜 저렇게 화가 났을까? 한 번 생각해주세요. 참고 참으며 얻은 화병을 삭히기 위해 자신의 명치를 쓸며 살아오셨을 그녀를 제발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중년의 그녀는 지금 많이 힘들어요. 행복한 중년이 어쩌고 저쩌고, 여기저기서 가르치지 못해 안달들인데 사실 중년의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중년이 아닙니다. 반항의 아이콘으로 이십 대를 보냈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