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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Dec 09. 2022

이 세상에 "괜찮아?"가 비처럼 쏟아져야 하는 이유

with [돈 많은 친구들(2006)]

 주방 일을 할 때 내가 엄청 집중을 하는 모양이다. 

냉장고에서 꺼낼 것들 다시 넣을 것들 생각, 정수기에 받아놓은 물 생각, 전기 밥솥 취사 완료까지 남은 시간 같은 건데 별건 아니지만 순서 없이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에 집중을 한다. 그러다 문득 거실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화가 난 듯 보이는 표정의 둘째 아이가 식탁 옆에 서서 꼼짝 않고 서 있다. 마녀의 저주에 걸린 듯하다. 얼른 저주받은 자신을 구원하라고 엄마인 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낸다. 


 "괜찮아?"

 

 그 말과 함께 아이는 저주에서 풀려나며 한숨 돌린다. 


"괜찮아. 식탁 의자에 발을 부딪혔는데, 엄청 아팠거든... 엄마는 괜찮아도 안 해주고... 

 엄마가 괜찮아할 때까지 기다렸지."


 비로소 나는 깨닫는다. 내가 나보다 더 '나 같은'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얼른 아이에게 늦게 알아봐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는 널 낳은 해에 이 의자에 발가락을 부딪혀 실금까지 났었다고 말해준다. 그러자 이번에 아이가 날 공감해준다. 실금까지 났으면 나보다 더 아팠을 거란다. 자긴 그 정도는 아니라며 발가락을 움직이며 이젠 괜찮다고 한다. 내 마음에도 행복이 찾아온다. 식탁 의자에 발을 부딪히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생각보다 아프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내 발이 조금만 다른 곳을 디뎠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 아닌가? 정말 이게 저주인가 싶은 생각도 들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설움은 부딪힌 후 시작된다. 아이는 자신이 식탁의자에 부딪혔는데도 설거지나 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야속함 때문에 더 속이 상한다. 그래서 그렇게 버티고 서서 엄마의 "괜찮아?"를 기다린 것이다. 누구보다 그 마음을 알기에 괜찮아? 정말 괜찮아? 진짜 괜찮아?를 아이에게 쏟아부어주며 마음을 다독여 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이 따듯한 순간 덕분에 우리는 더 행복해진 느낌까지 든다. 저주를 푸는 열쇠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괜찮아? 가 좋다. 말뿐이라도 좋다! 이 별거 아닌 괜찮아? 가 나에게 비처럼 쏟아지길 바란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괜찮아? 에 인색한 남편 때문에 내 일상이 척박한 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명절이 다가올 때 며느리로서의 의무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여간다. 그렇게 내가 시들시들해질 때 남편은 괜찮아?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이유는 괜찮아?라고 묻는 순간 나는 괜찮지 않다고 할 것이고, 이것 저것 다 싫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남편은 내가 싫다는 것을 나서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아예 괜찮아?를 입에 담지 않고, 시들시들해져 가는 내 모습을 못 본 척하며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우리보다 더 한 집도 있는데 뭘. 


내가 육아에 지쳐 있을 때도 남편은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유수유 때문에 고단한 나에게 그저 말뿐인 괜찮아? 는 오히려 비겁한 게 아닌가?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에게 말뿐인 괜찮아? 에 집착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중요한 건 팩트잖아! 난 그렇게 나쁜 남편은 아니야!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며 말뿐인 괜찮아? 정도는 패스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점점 수많은 괜찮아?를 떼어먹다 보니 점점 입에서 멀어지고 머릿속에서도 사라진다. 아내의 상태를 살피지도 않는다. 그러다 정말 별거 아닌 순간이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괜찮아?를 놓쳐 아내를 성나게 한다. 예를 들면 아내가 싱크대 앞에 서서 오렌지의 두꺼운 껍질을 까다가 한숨이 툭 튀어나온다. 그 순간 그저 말뿐이어도 되는 한마디 괜찮아? 면 마법처럼 열릴 행복의 문마저 영원히 열리지 못하도록 못을 쳐 닫아버리고 만 것이다. 평균 이상의 좋은 남자도 이런 실수를 하면서 산다.      





 '돈 많은 친구들(2006)'이라는 영화는 젊은 시절부터 우정을 쌓은 여자 네 명의 이야기다. 셋은 기혼이고 돈이 많지만,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제니퍼 애니스턴은 미혼이고 돈이 없다. 가진 자와 없는 자 그 사이의 미묘한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부부의 이야기 중 시나리오 공동집필을 하는 부부의 에피소드에 공감을 했다. 박수까지 쳤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남편이 괜찮아?를 떼어먹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부부가 말다툼을 벌이던 중 여러 가지 사건으로 머리가 복잡한 아내가 뜨거운 냄비를 손으로 만져 화상을 입는다. 그녀는 놀랐기도 하고 아프기도 해 급히 냉동실 문을 열어 데인 손을 넣고 열을 식힌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상황에서도 아내에게 괜찮아?를 하지 않고 떼어먹는다. 아내는 말한다. 내가 지금 손을 데었는데 왜 괜찮아?라고 묻지 않느냐고. 남편은 넌 지금 괜찮지 않냐고 괜찮으면 된 거란다. 아내는 내가 다치고 내가 괜찮다고 말하는 게 맞냐고 묻는다. 남편은 뭐가 문제냐고 한다. 오로지 괜찮아? 때문은 아니지만 결국 둘은 이혼을 한다. 이혼 이후, 2층 작업실에서 혼자 시나리오를 쓰는 그녀, 남편과 함께 공동집필을 하던 맞은편 빈 책상을 보며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낀다. 복잡한 마음 탓인지 그녀는 집필을 멈추고 자리를 뜨려다 그만 철제 책상에 다리를 부딪히며 악! 소리를 낸다. 그 순간 1층에서 들려오는 보모의 목소리 


 "괜찮아요? 크리스틴" 


그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괜찮아? 는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아주 기본적인 배려라는 사실을. 



 새벽에 비가 내려서 학교로 가는 길이 꽝꽝 얼어버렸다. 

아파트 단지 후문에서 초등학교 후문까지 길어야 5분도 안 걸리는 짧은 거리지만 아이 손을 잡고 걷는다.

오늘은 길이 살얼음판이라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서로를 붙들고 최선을 다해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럼에도 오래 신어 반들반들해진 모카신 바닥이 살얼음판 위에서 이리 미끌 저리 미끌 

나는 여러 번 위기를 맞으며 비틀거렸다. 

그 순간 3학년 어쩌면 4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우리 옆을 지나며 나에게 말했다. 


"괜찮으세요?" 


어쩜 이렇게 달콤할 수가! 너는 어느 집 아들이니? 정말 최고의 남자가 될 거야!  


"어머 세상에... 아줌마한테 괜찮냐고 물어봐줘서 고마워!" 


그 아이가 우리를 지나쳐 앞으로 갔다.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아이를 보니

너무 기특하고 예쁘다. 그래! 괜찮아? 는 정말 멋진 거다. 그저 날 생각해준 그 마음만으로 내가 이렇게 

행복해지다니... 이 세상에 괜찮아? 가 비처럼 쏟아져야 한다. 비처럼 펑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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