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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Jan 17. 2023

너무 가벼워 사라진 일상도 조용히 쌓이고 있다.    

tvn'캐나다 체크인' / jtbc'손 없는 날'

  재활용 버리기, 아픈 아이와 병원 다녀오기, 설거지와 끼니 준비, 창문 열고 환기, 화초 물 주기, 모인 빨래 구분해 정리, 세탁기에 그 빨래 넣기, 마른빨래 걷어 정리하기...  좀처럼 끝나지 않는 주부의 일.   

건조기에서 나온 수건은 아직 바구니에 담겨 정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결국 내가 할 일이니 거실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저 꼴만 참을 수 있으면 된다. 오후 4시쯤 잠깐 게으름을 피우며 이효리의 '캐나다 체크인'을 본 거 말곤 성실한 하루를 보낸 거 같은데 막상 잠들려고 하니 왠지 마음이 괴롭다. 


주방에서 일하는 동안 탭으로 '금쪽같은 내 새끼'와 '실화탐사대'를 봤는데 둘 다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슬픔에 빠진 가족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좀 있다 스마트 폰으로 어떤 기사를 봤는데 어떤 공무원이 음주운전을 하다 역주행까지 해 큰 사고를 내 어떤 분이 사망을 했다고 한다... 가족을 잃고 슬픔에 빠져있을 누군가가 생각나 마음이 무거웠지만, 또 내 일상은 물 흐르듯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고...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우울함이 마음속에 차오르며 불안이 밀려온다.  

 

 이 아줌마가 돌았나? 할 거 같은데, 나 사실 '캐나다 체크인'의 이효리를 보다가 질투가 났다. 

그녀의 외모, 몸매, 특히 웨이크 보드를 타며 보여준 강력한 코어 힘. 그거 물론 질투 났지만 그보다 더 나를 자극한 건 그녀의 하루에 가슴 뛰는 순간이 참 많더라는 거. 동물사랑이라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주제가 이끄는 그녀의 일상. 그리움과 고마움, 자연과 하나 되는 경이로운 순간에 그녀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들이 참 아름답더라! 나도 그런 표정을 짓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긴 겨울 방학, 아이 끼니를 챙기고 청소와 정리를 하며 아! 정말 내 일상은 아름다워요! 정말 가슴 뛰거든요! 하면 너무 이상해. 그렇다고 '가슴 뛰기' 위해 어디로 확 떠날 용기도 없고 상황도 안 되는 나는, 업무가 확실한 엄마다. 지난 주말 피검사를 한 둘째. 그 결과를 듣기 위해 목요일엔 병원예약이 있고, 오래 버텼는데 결국 코로나의 걸린 큰 애가 지금 자기 방에 격리돼 있으니 끼니와 약을 챙겨줘야 한다. 게다가 아주 중요한 시험도 28일인가? 27일인가? 있다고 했지...    


 지난주에 어쩌다가 '손없는 날'이라는 jtbc 프로그램을 봤는데, 오랫동안 한 동네에 거주하다가 청약이 당첨돼 이사를 가게 된 가족의 이야기였다. 엄마 아빠는 맞벌이로 직장생활을 했던 거 같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매의 양육을 도와주신 모양인데, 대충 청소년으로 보이는 손자 손녀의 인터뷰 내용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 남매를 재밌고 편안하게 돌봐주셨던 거 같다. 재밌고 편안하게...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나 보다. 손녀는 중환자실에 계신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을 때 편지에 사랑한다고 써서 전달했다고 한다. 그 편지는 어쩌면 할아버지를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그리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이후에도 손자 손녀의 마음속에 그토록 애잔하게 존재하고 있다. 너무 멋져! 누군가의 마음속에 애잔하게, 오래오래 그리움으로 남고 싶어! 나의 두 딸에게, 어쩌면 내 딸의 아이들, 손자 손녀에게까지. 그럼, 나 지금 주부의 일상이 지루하다고, 가슴 뛰고 싶다고 오두방정 떨면 안 되는 거잖아! 어딜 감히 이효리 인생을 넘봐. 나 정말 미쳤나 봐. 


나에게 주어진 날들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 끝이 있다. 누구나 그렇다. 그게 인생이다. 주어진 시간 동안 나는 일상을 살아간다. 가끔은 너무 가볍고 부질없어 보이지만 나는 이 좁은 길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내 곁에 소중한 가족이 내가 차린 식탁을 기다리고 있다. 침묵으로 퀴즈를 내기 시작한 둘째의 사춘기를 견뎌야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점프 또 점프! 힘을 내고 있는 첫째를 조용히(이게 정말 힘들다!) 바라봐야 한다. 은퇴를 늦추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남편을 응원하고 사랑해 줘야(이건 더 힘들다!!) 한다. 어쩌면 부질없는 건 내 가벼운 일상이 아니라 가슴 뛰고 싶다는 야망이 아닐까? 할 수 있어! 도전해! 속삭이는 유혹의 말도 지금 나에게는 독이다. 말도 안 되는 야망 불태우며 마음 볶지 말고 편안하고 따듯한 표정과 다정한 말로 엄마답게 쫌! 


내 가벼운 일상의 무게가 0. 몇 프로 포인트처럼 쌓이고 있다. 포인트가 많이 쌓여야 좋은 사람, 멋진 할머니가 된다. 그래야 내 아이들 마음속에 오래도록 애잔하게 존재할 수 있다.   


"remembe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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