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지원 Mar 08. 2022

엄마가 신데렐라가 된 이유  

중년에 쓰는 육아일기: 세상 어디에도 없는 늦둥이의 맛

 나는 신데렐라다. 


무얼 하고 있든, 설사 그 일이 지구의 평화에 관련된 일이거나

50년 만에 폭발한 나의 창의력이 분수처럼 꽃을 피우는 순간일지라도 

낮 12시 30분이 되면 둘째 아이가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 후문 앞에 딱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흠흠... 말이 그렇단 얘기다. 

밥차리기도 벅찬 내가 지구 평화에 관련될 일도,  

50년 만에 창의력이 폭발할 리도 없다.  

또 그 순간이 딱 낮 12시 30분이 될 확률 또한 거의 제로에 수렴할 테니. 하하하 

 

나는 12시 30분부터 학교 후문에 서서 신발주머니를 들고 뛰어나오는 아이를 기다린다.

아이가 나오면 우리는 손을 잡고 집을 향해 뛴다. 

집에 도착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카레밥을 먹게 하고 

다시 신발주머니를 들고 학교를 향해 우리는 달린다.  

학교와 약속했다. 6교시 수업이 시작되는 1시 10분 전에 

반드시 아이를 교실에 들여보내겠다고.     


우리 아이는 폐기능이 약해 코로나 기저질환자에 해당된다.

그래서 학교 급식이 위험하다. 마스크를 쓰고 밥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확진자의 숫자 그런 것보다는 그냥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항은 피하게 해주고 싶어

작년엔 6교시 수업이 있는 날엔 그냥 조퇴를 하게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이가 마지막 교시 사회 수업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종알종알 자신의 주장을 신나게 펼치던 아이, 갑자기 풀이 죽으며


"근데 엄마, 난 이거 발표 못해 그 수업 시간에 집에 와야 돼... "


너무 속상했지만 아이를 달랬다. 위험한 건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조퇴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신발주머니를 들고 학교로 가는 아이들이 보이는 거다.

저 아이들은 뭘까? 왜 이 시간에 신발주머니만 들고 학교에 갈까? 궁금해 알아보니 

급식만 먹으러 학교에 간다는 것이다! 어? 급식만 먹으러 학교에 가는 아이도 있는데

급식만 먹으러 집에 오는 건 왜 안되지? 

조심스럽게 선생님께 가정 급식에 대해 말씀을 드려보았다. 

선생님은 그 아이들은 정책에 맞춰서 그렇게 하는 아이들이고 

가정 급식은 정책으로 내려온 것도 없고,

지금껏 그렇게 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안된다고 하시는 거다.  

내가 너무 튀는 것인가? 그래도 다행히 통화 막판에 선생님께서 교장 교감 선생님과 

한번 논의를 해보겠다고 하시며 사유서와 진단서를 아이 편에 한 번 보내보라고 하셨다.

사유서! 이거라면 내가 또 기가막히게 잘 쓸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왔다.

마음만 먹고 쓰면 A4 대여섯 장은 거뜬히 쓸 수 있을 거 같았지만

너무 튀는 거 같아 딱 한 장으로 담담하게 눈물이 참으며 꾹꾹 눌러쓴 듯한 

사유서를 써 아이 편에 보냈다.


그날 오후, 선생님의 문자가 도착했다.   

나는 결국 담임, 교장, 교감 선생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브라보. 

대신 집에 오갈 때 엄마가 반드시 아이와 동행해야 한다는 확인서에 사인을 했다.

그렇게 나는 신데렐라가 됐다. 


올해는 가정 급식 확인서라는 규격화된 가정통신문이 만들어진 걸 보니 

나로 인해 어떤 선례가 만들어진 거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고학년이 되니 수요일을 빼고 모두 6교시라 

거의 매일 아이와 손을 잡고 뛴다. 시간이 바트다. 

30분에 나오는 법은 없고, 늘 40분쯤 나오니 

집에 와 밥 먹고, 다시 학교에 1시 10분까지 데려다주려면 숨이 차게 움직여야 한다.  

종종 후문에서 급식을 하지 않고 나오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다른 엄마들을 만난다. 

한결같이 아이들을 걱정하고, 코로나를 원망하며 그렇게 서 있다. 

기저질환 관련 가족력이 있어서, 

남편 직장이 사회복지 관련된 곳이라 더 조심해야 해서,

다양한 이유로 이렇게 힘든 길을 가는 것이다. 모두 훌륭한 엄마들이다.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이 자랑스러운 날도 있다. 

하지만 어떤 날은... 

 


국문과를 전공 중인 큰 애가 개강을 하고 나니 

책상에 이런저런 학업에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다. 

청소를 하러 방으로 들어갔다가 강렬한 블랙 앤 핑크의 책 표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목은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작가는 조에나 러스. 

제목에서부터 스멀스멀 풍겨 나오는 페미니즘의 향기!

1937년에 태어나 70년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부흥을 이끈 작가이면서

코넬, 예일 학벌마저 대단한 교수로 백인 남성 중심의 SF 문학 사조를 비판한...  

아무튼 엄청 대단한 분인 거 같다. 

문득 청소기를 내려놓고 그 책을 펼쳤는데 

서문에 이 작가가 한 말이라고 소개된 문장 하나,


" '가정주부'라는 직업은 피해야 함과 동시에 미화하고 

   그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아이고 아파라. 나 뼈 맞은 건가?   


엄마는 신데렐라. 

신데렐라는 재투성이. 

고로 엄마는 재투성이?!  


나는 지금 엄마의 역할을 미화하고 정당성을 입증하고 싶다.  

동시에 페미니즘을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아이 손을 잡고 달린다.

나는 신데렐라니까! 

   





뼈 맞은 건 아팠지만, 덕분에 오랜만에 중년의 육아일기 한 편 썼어요.   

의도하고 이 글을 쓴 건 아닌데, 오늘 3월 8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라고 하네요. 




      



 


이전 06화 너무 가벼워 사라진 일상도 조용히 쌓이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