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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할머니

아쉬운 마음

by 임지원


자동차 보조석에 큰애를 태우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내 시선을 사로잡는 풍경 하나.


"10시 방향에 할머니 보여?"

"10시? 어 어어 왜?"

"저 할머니 저기 앉아서 뭐 하시는 줄 알아?"

"? 뭘 하셔?"

"할머니 담배 피우신다!"

"오~ "


길을 걷다가 담배연기가 코로 들어오면 재빨리 근원지를 찾고 그 반대로 방향을 바꾸는 아이다. 썸을 탈 뻔했다가도 그 상대가 담배를 피운다는 정보에 마음을 접을까 고민하는 아이인데도 모르는 동네 할머니의 길 위 흡연은 흥미로웠나 보다.


"이 밝은 아침에 저렇게 다 보이는 데 앉아서 담배 피우는 할머니, 좀 멋져 보이지 않냐?"

"그러게..."


깔끔한 할머니 슬프고, 심술궂은 할머니 슬프고, 병원 대기석에 앉아 계신 할머니 너무너무 슬픈데, 그래도 가끔 저기서 담배 피우시는 할머니를 만나면 슬픔이 덜한 느낌이랄까?


어둠이 내려오면 종일 모인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초록 봉지를 묶는다. 벌써 기분이 나빠진다. 증거 인멸하는 범죄자처럼 얼굴에 마스크를 끼고 한 손에 고무장갑도 끼고 초록 비닐봉지를 집어 든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남편을 찾는다. 저기 있군. 남편은 소파에 앉아 골프 자세를 설명하는 TV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한번 째려본다. 흥!! 그래도 집에서 유일하게 돈을 버는 중요한 분이시니 이런 지저분한 허드렛일까지 해달랠 순 없을 거 같다. 내가 돈을 벌 땐 자주 해달라고도 했고 해주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내가 하고 만다. 현관 바로 옆 작업실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는 막내에게 한 마디를 던지며 신발을 신는다.


"엄마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데 지금 밖이 깜! 깜! 하잖아, 혹시 계속 안 들어오면 신고해라!"


아무 대답이 없어 다시 보니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다. 현관문을 열자 깜깜한 복도 천장에 달린 센서등이 나에게 작은 빛을 보내준다. 이내 사라진 불빛. 어둠을 뚫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니 9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중이다. 얼른 나도 내려가요! 버튼을 누르니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열리는데 안에는 회색 모자와 회색 와이셔츠, 회색 바지, 그리고 회색 피부, 머리카락까지 온통 다 회색인 그레이 할아버지가 서 있다. 담배 피우러 나오신 거다. 이렇게 만난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만날 때마다 어색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는 무서우셨을 거 같다. 만약 박찬욱 감독님이 아줌마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일상 호러 영화를 만든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초록 비닐봉지를 수거함에 넣고 돌아오는데 담배 연기가 솔솔 코로 들어온다. 그레이 할아버지의 담배 연기다. 역시나 자전거 보관소 옆에 선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얼른 지나가야지, 발걸음을 재촉한다. 딱히 멋질 것 없는 평범한 할아버지다. 그레이 할아버지와는 지하 주차장에서도 몇 번 마주쳤는데, 할아버지 차는 벤츠다. 할아버지 행복하신가?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담배 피우는 할머니는 멋져 보이고, 할아버지는 평범하게 느껴진다. 왠지 참아도 할머니가 더 참았을 거 같고, 눈물도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가 더 많이 흘렸을 거 같다. 기구한 운명도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 쪽에 더 어울리고...


모르는 할머니를 보면 우리 할머니가 생각난다. 일제강점기엔 함경도에서 강 옆에 둑을 쌓고 일본군인에게 돈을 받은 어린 할머니, 6.25 전쟁 때는 아들을 등에 업고 남쪽으로 피난을 온 할머니, 엇나가는 아들 걱정에 새벽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던 할머니, 죽음 앞에서 깔끔하려고 너무너무 애를 썼던 나의 할머니...

할머니 그렇게 기도만 하지 말고 그냥 다 보이는 데서 담배라도 피우지 그랬어.



돌아가시기 3일 전 함께 한 마지막 순간 (2021.8)












흰고무신에 모시적삼까지. 할머니의 호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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