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밥 한 번 먹자는 약속

우리의 육아는 현재 진행형

by 임지원


밥 한번 먹자는 공수표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그 밥 한번 먹자는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 있다. 얼마 전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한 십 년 아주 가깝게 지내던 육아동지를 만났다. 그녀도 나도 연고가 없는 뜬금없는 동네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난 것이다.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각자의 일정이 있었기에 서로의 근황에 대한 짧은 대화만 나누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돌아서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 우리 밥 한 번 먹어요. 날 잡아요. 꼭 만나요! 의미 없는 공수표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마음이 따뜻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좋았다. 왜 사람들이 밥 한번 먹자는 공수표를 주고받는지 알 것 같은 느낌. 당장은 아니어도 조만간 그녀를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진짜 만나는 건 힘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긴 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린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고, 예전처럼 음식과 일상을 나누지 않는다. 함께 소속된 공동체도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얼마 후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한 번 만나요! 밥 먹어요! 심지어 우리 동네로 오겠다고 한다. 너무 멀다! 우리 그럼 중간 어디서 몇 시에 만나요! 그렇게 밥 한번 먹자는 공수표가 진짜 약속이 되었다. 신기했다. 우리가 정말 만나게 될까?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우리는 2000년에 첫 딸을 낳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는 이후 거의 연년생으로 딸 둘을 더 낳아 명실공히 세 딸의 엄마가 되었고 나는 첫 딸의 출산만으로도 넋이 나가 그냥 딸 하나의 엄마로 일단 살았다. 성격도 많이 달랐다. 한마디로 그녀는 거북이처럼 우직한 뚝배기, 난 토끼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양철냄비 같았다. 이렇게 성향이 다른 엄마의 육아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녀는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요즘 스타일이다. 이래서 딸이 있어야 한다. 그녀는 세 딸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난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내 기억 속 귀여운 세 아이들이 모두 대학생이 됐다는 게 신기했다. 뚝배기 엄마 덕분에 생긴 자립심, 독립심 덕분에 모두 알아서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학원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큰애는 담임 선생님과 함께 입시 전략을 세웠고, 둘째와 셋째는 경험을 해본 언니가 다 코치를 했단다. 고작 한두 살 차이 나는 언니가 동생들을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내기도 한다니 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북이+ 뚝배기 엄마의 저력이 느껴졌다. 물론 딸 셋을 우르르 같이 키울 땐 쉽지 않았을 것이다. 늘 지쳐있던 그녀의 모습도 문득 생각이 났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확실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출산과 육아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저런 끝이 있다. 난 서른아홉에 낳은 늦둥이 사춘기 수발과 또 한 번 치러야 할 입시 걱정에 잠이 안 온다고 투덜거렸다. 그녀는 그 아이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냐며 잘했다고 잘했다고 칭찬이다. 정말 잘한 건가? 난 걱정이 많고 마음고생을 사서 하는 터라 요즘 힘들었는데 거북이+뚝배기 엄마의 좋은 끝을 보고 나니 생각이 많아진다. 난 지금 중년이고 체력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토끼 엄마 그만하고, 이제 거북이+ 뚝배기 엄마 흉내 좀 내볼까? 거북이+뚝배기 엄마 닮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노력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아이가 셋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웃는다. 그래 저 웃음이었다. 장식이 없는 수수한 웃음.


그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막내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어디야?" 중학교 2학년이지만 목소리는 아직 어린아이 같다. 귀여움이 뚝뚝 떨어진다. 내 착각인지 아닌지, 아무튼 이 아이가 날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음속에 따듯한 기운이 가득 찬 느낌... 그녀와 일상을 나누던 그 시절. 난 딸 하나의 엄마였다. 그렇게 평생 살 줄 알았는데! 서른아홉에라도 막내를 낳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안 그랬으면 그녀의 개성 넘치는 세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질투가 났을 거 같다. 셋은 아니지만 그래도 딸이 둘 있다! 밥 한번 먹자는 약속으로 확인한 건 우리의 육아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거다. 한 십 년 뒤 또 이렇게 우연히 만나 밥 한 번 먹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나의 두 딸. 2024.04 도쿄 우에노 거리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