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산책하는 여자 정미현 6.
현수와 베트남 리조트에서 한 달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자 학기가 시작됐다.
우리는 베트남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라고 해봐야 항상 바빴기 때문에 추억도 별로 없었다.
그를 빨리 정리하고 앞으로 우리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했다.
현수는 아예 다른 나라에 가서 살자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생각을 할까 나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말이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갑자기 삶을 터전을 가꾼다는 것은 드라마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망가듯 떠나고 싶지 않았다.
현수를 설득했다. 현수도 ‘이민자’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편견과 차별에 대한 두려움은 그곳에도 존재하고 있다. 대화 끝에 우리는 일단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우리의 삶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살던 곳에서 두 시간 이상 달려야 도착하는 지역의 신축 주상복합을 계약했다.
그리고 근처 중학교에 가서 전학 수속을 밟았다. 방학이 끝나고 현수는 등교를 시작했다.
나의 바람은 오직 하나. 현수가 주목받지 않고, 조용히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가끔 운동장에서 만나 농구나 축구도 하고, 피시방에서 게임도 하는 친구를 만나길
나는 바라고 또 바랬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현수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우리 현수가 얼마나 좋은 아이인데, 그걸 몰라본다면 그건 그 아이들이 바보인 거지!
너무 행복했다. 심지어 현수는 교내에서 열린 영어토론대회까지 나가 팀을 이룬 친구들과 함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삼겹살 파티를 열어주었다.
담임선생님도 괜찮았다. 우리에 대해 많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현재 현수의 모습에만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있으니 눈에 거슬릴 것도 없었던 모양이다.
조용히 편안하게 우리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지난번 영어토론대회에 같이 참여한 아이의 엄마인데, 삼겹살 파티를 열어줘 고맙다며
모임에 초대를 해도 되겠냐고 묻는 거다. 솔직히 조금 망설여지는 마음이 있었지만,
현수를 위해 용기를 냈다. 근처 백화점 7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오전 11시.
나는 조금 일찍 출발해 1층 화장품 코너로 갔다. 수분크림 열 개를 사 개별포장을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7층에 도착해 먼저 화장실로 갔다. 파우더 룸에서 잠깐 거울을 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이번에 전학 온 애,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그 있잖아, 엄청 유명한 교수인데, 재작년엔가 작년엔가 산에 가서 죽은, 그 교수 아들이래.”
“아! 그 교수! 무슨 신약인가 개발한 엄청 촉망받던 교수라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며?”
“그럼 뭐 해 조강지처 버리고 산에 가서 죽었는데."
“벌 받은 거지 뭐. 그 상간녀가 유산 다 가져갔다고 친 딸이 글 올리고 난리 났었잖아,
그 교수의 혼외자가 우리 반에 전학 온 그 아이래.”
“남의 가정 파탄내고, 피눈물 나게 하고, 떵떵거리면서 살겠구나... 자긴 그걸 어떻게 알았어?”
“뭐 요즘 건너 건너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다섯 단계 건너면 트럼프도 알 걸?”
“오늘 모임에 온데?”
“글쎄.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한번 전화 걸어봤지.
오라고는 했는데, 설마 오겠어?”
머리가 띵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개별 포장한 수분크림이 담긴 쇼핑백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천천히 파우더 룸에서 걸어 나왔다. 그저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누는 그 무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 틈에 끼어 손을 씻었다. 거울에 비친 그녀들의 얼굴에는 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정말 그럴까? 당신들은 언제나 그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우르르 나가는 뒷모습을 보인다.
나는 상간녀가 아니다. 우리 현수도 혼외자가 아니다.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운전을 할 수 없었다. 분노를 멈출 수 없었다. 심호흡을 했다.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게 계속 그렇게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깊은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차에 시동을 걸렸는데, 저기 멀리 아까 화장실에서 본 그 무리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여기까지 함께 차를 타고 온 모양이다.
내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된 대형 세단에 다섯 명의 엄마들이 탔다.
그 차가 출발하자,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같이 출발했다. 그 차의 뒤를 따라갔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전에 나에게 초대 전화를 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자마자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와 함께 그 안에 탄 여러 명이 함께 내는 소란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내가 상간녀든 현수가 혼외자든 아니 내가 혼외자든 현수가 상간녀든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가십거리였을 거다.
남편이 작년에 죽었는지 재작년에 죽었는지도 정확히 알지도 못한다.
나에게 특별한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만이라도 해 줄 수 없는 건지.
눈물이 쏟아졌다.
스피커폰으로 들리는 목소리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야? 저장된 번호 아니야? 몰라? 뚝. 전화가 끊어졌다.
갑자기 정신이 맑아졌다. 그래 한 번쯤 나의 분노를 폭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차가 보였다.
나는 따라붙었다. 속도를 높이며 계속 따라붙었다. 잠시 후 사거리에 빨간 불이 켜졌다.
그 차가 브레이크 등이 켜지며 속도를 줄인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액셀 페달을 밟았다.
더 세게 더 세게. 부우우웅.... 쾅. 에어백이 터지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 옆에 현수가 있었다. 그새 현수의 눈이 더 깊어졌다.
아직 중학생인 저 아이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후회가 밀려왔다.
“엄마 괜찮아? 괜찮아?”
“현수야, 그동안 힘들었던 거야? 왜 엄마한테 말 안 하고 참은 거야...”
“그래도 몇 명 괜찮은 친구 있었어.”
“엄마가 망친 거야?”
“아니... 엄마 나 친구들 눈치가 보여... 내가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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