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단녀의 꿈

중년의 그녀는 대부분 경단녀일지도.

by 임지원

지난 금요일 아침, 평소보다 더 빨리 눈을 떴다.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의욕이 넘쳤다. 신바람이 났다.

이유는 마감, 다음 주, 월요일까지 주기로 한 원고가 생겼기 때문이다!


뭐든 쓸 원고가 있다는 게 이렇게 내 삶을 기운 넘치게 하는구나!

아직 자고 있는 남편을 두고 자전거를 갖고 집을 나왔다. 가까운 트랙에서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탔다.

저녁에 산에 가서 해지는 거 보기로 했으니까 오늘은 아침에도 운동, 저녁에도 운동!

난 정말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해! 이제 일 다시 시작하니까, 동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건강이 필수니까. 힘들고 피곤하면 늘 찾아오는 이석증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다! 다시 일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작년에 잠깐 청소년 교육용 시나리오 작업을 의뢰받고 원고를 써준 곳인데, 이번에 아예 직원으로 들어오면 4대 보험과 적은 기본급을 주겠다고. 그리고 인센티브 형식으로 일한 것에 대한 돈을 추가로 지급하겠다는 거다. 물론 재택으로. 나 드디어 경단녀 탈출하는 것인가? 지병인 이석증 하나, 걱정됐지만 일단은 해보겠다고. 얼마를 줄 건지도 묻지 않고 덜컥 고맙다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통화하며 다시 일 시작하는 거 너무 설렌다고 몇 번을 말했던가!


드디어, 얼굴이나 보자는 첫 미팅 날. 사무실에 가서 낄낄 호호 헛소리를 주절거리며(이게 또 내 전문분야다...) 정말 중요한 돈 얘기는 하지도 않고, 앞으로 잘해보자고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마감이 있는 나의 삶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온 나는 메일로 온 자료를 열어 보며 원고 작성을 시작했다. 15분짜리 영상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넘치는 거 같지만 일단 썼다. 그런데, 문제는 스토리보드 작성. 예전에 내가 일을 할 때는 15분 정도의 영상은 한글 파일로 원고 작성이 끝났는데 여기서는 원고를 파워포인트에 옮겨 관련 이미지, 자막, 표 등등 이런 걸로 디자인을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달라고 하는 거다. 은행, 대기업 등에서 보는 이런저런 이러닝 과정을 개발할 때는 나 역시 그런 작업을 했었다. 하지만 15분짜리... 교육용 영상을 스토리보드로? 방식이 좀 낯설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라테는 안 그랬어요.. 그럴 수도 없고, 열심히 파워포인트를 열어놓고 기억을 떠올리며 작업을 했다. 힘들었다. 너무 서툴렀다. 슬펐다.

게다가 앞으로 OOOO과정 1시간짜리를 6차시 작업을 해주기로 했는데 이걸 파워포인트로 작업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머리에서 윙~ 이석증이 오는 느낌인 거다. 마음이 힘들어졌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이걸 하고 얼마의 돈을 받는가?


용기를 내,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다. 경력이 20년이어도 이런 걸 물어보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

어쨌든 내 경력은 단절됐고,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해야 하는 약점이 많은 노동자가 아닌가.

그와 중에도 난 일을 다시 시작한 것만으로 설레는 중이다.


이후, 그쪽에서 들은 답변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상상도 못 해 본 금액이었다.


이 일은 '설계자'의 일로 업계에서 딱 그렇게 정해진 금액이라고 하니, 뭐라 할 말도 없고, 기본급이라는 것도 내가 출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많이 줄 수 없다는 것. 20년 전보다 나아지기는커녕 훨씬 후퇴한 이 업계 상황에 나는 큰 충격을 받고 멍... 했다.


주말에 작업해, 월요일 아침에 보낸 원고, 카톡으로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점점 내용 추가돼 결국 A4 다섯 장이 된 그 원고에 대해서는 원고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고, 앞으로 더 일을 같이 하기는 어렵겠다고 정중하게

의견을 전했다.


꽤나 설렜던 며칠을 보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적은 돈이라도 뭔가 버는 사람이고 싶다는 내 마음.

아직 뭔가 쓰는 사람으로 현역에 남고 싶다며 욕망에 불탔던 나의 모습. 그래 봐야 타인인 사람들과 일적으로 소통하며 보람 좀 느껴보겠다고 도서관 가자는 아이에게 TV를 틀어준 나에 대해... ㅜㅜ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진짜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한 채 또 한 번 현실과 타협해 주저앉았던 나에 대해...


파일을 정리하고, 마음도 정리했다. 얼마 남지 않은 중년의 인생, 파워포인트에 매몰돼 다 허비할 수는 없지.


주방으로 가 앞치마를 두르고 양파를 막 다졌다. 거대한 프라이팬에 다진 양파를 던져 넣고 기름을 두르고 지글지글... 갈색이 되도록 지글지글 그 사이 감자 파프리카 당근을 썰었다. 간간히 달려가 양파를 뒤적뒤적.

물을 붓고, 썰어둔 야채를 퐁당. 다음으로 카레 가루를 풀어 카레 완성. 오늘 같은 날은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백숙해먹으려고 사둔 영계 두 마리를 깨끗이 씻고 쾅쾅 토막을 냈다. 거기에 소금과 후추를 뿌려 조물조물, 잠시 두었다가 우유를 붓고 튀김가루를 넣어 또 조물조물 팬에 기름을 붓고 온도가 올라가면 반죽한 닭을 한 덩어리씩 던져 치지직... 튀기기 시작했다.


"엄마 이게 무슨 냄새야?"

"치킨이지!"

"엄마 최고!"


아이가 빙글빙글 돌고, 뛰고 난리다. 치킨에 카레까지. 이걸 사 먹으면 돈이 얼만가! 지원아, 차라리 밥을 해서 돈을 벌자!



중년의 그녀들은 대부분 경단녀다. 선생님 하다 경단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연예기획사 매니저 하다 경단녀, 유치원 교사하다 경단녀, 공무원 하다 경단녀, 피아노 치다가 경단녀, 스튜어디스 하다가 경단녀, 대기업 다니다 경단녀, 내 친구는 반도체 무역하다가 경단녀... 중년의 그녀들, 수다가 깊어지면 어김없이 사표 쓰던 날, 일 그만두던 날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 말렸는데, 육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회식자리에서 눈에 힘 빡주고 '아~무 것도 필요 없어!!' 박미경의 '이브의 경고'를 부르고, 룰라의 여성 보컬 김지현의 엉덩이 춤도 부끄럼 없이 신나게 추던 X세대 그녀들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로 살아간다.



학이 그려진 화분.jpg 내가 그린 [학이 그려진 화분] _ 아이패드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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