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읽던 그녀인가요?

by 임지원

나의 방송 경력은 드라마 보조작가에서 끝이 난다. 저는 드라마 보조작가가 되기 위해 살아왔어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혹시 나의 글을 읽고 나란 사람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어 작가 소개란의 적힌 내용을 봤다면 뭔가 아쉬움이 남는, 안쓰러운 경력이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 또한 나의 자격지심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지루할 수밖에 회의에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소리들을 잘 나불거려 드라마 보조작가로서는 나름 인정을 받아 아예 전문 보조작가로 남는 것도 괜찮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땐 그게 위로가 됐다. 그 시절 나는 드라마 공모전에서 계속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점점 쓰고자 하는 의욕도 사라지고, 나불대기만 하는 보조작가의 숙명에 염증이 날 즈음 갑작스럽게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왠지 울고 싶은 데 누가 뺨 때려 준 듯 환상적인 타이밍이었다. 갑자기 저 드라마 작가 안 할래요, 하면서 내려오기 민망한 그 컨베이어 벨트에서 비로소 내려올 수 있었다. 임신이 뭐라고 그렇게 별나게 구냐는 눈총도 없었다.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가 이어지며 아주 오랫동안 직립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내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버티고 버텨 27주 1.08kg 이른둥이를 출산했고, 이후 나의 삶이라는 건... 암튼 엄마 역할 하나만으로도 버거운 하루하루였다. 그렇게 드라마와는 갑작스러웠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연을 끊고 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드라마, 드라마 이걸 매조지하고 싶다는 열망이 꺼지지 않았다.

잔불이 남아 작은 바람에도 가끔씩 활활 타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추운 겨울, 부부싸움 끝에 집을 나온 아내가... 다음 날 아침 아파트 주변에서 싸늘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놀이터에서 다섯 살 남짓한 아이와 함께 있던 그녀를 본 엄마들이 너무 마음 아파했다. 그때가 제일 힘들 때이긴 한데, 그거 잠깐 지나가면 괜찮을 텐데... 하면서.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파 며칠 힘들었다. 그땐 칼럼을 연재하던 시기라 주부로서의 삶에 대한 슬픔 고뇌 애환... 이런 걸 막 쓰면서 몸부림쳤다. 그녀에게 해주지 못한 말이 가슴에 남아 힘들었다.


그렇게 그녀가 있던 자리를 지날 때마다 그녀를 생각했다. 문득 아무 이유 없이 그녀가 떠올랐다. 어느 밤이었는데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건물 출입문으로 들어가는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왠지 걸음걸이가 현실감이 없고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혹시 그녀일까?

무섭다기보다는... 슬펐다. 그녀가 아직 이곳을 떠나지 못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났다. 사납게 굴었다. TV에 뭔가 포장된 주부의 삶이나 육아 판타지 같은 게 나오면 리모컨을 던져버렸다. 니들이 진짜 주부의 삶을 알아?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연애할 때나 사랑이지, 사랑이 다 무슨 소용이야. 싸우면 남보다 못한 게 가족이지. 남편은 절대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

왜들 그렇게 행복한 척들이야? 다들 비슷하게 불행하게 살면서 아닌 척, 행복한 척하는 거잖아!!!!!!! 악!!!!


더 슬펐던 건 아이가 크면서 이런저런 학부모 모임이 이어졌고 그곳에서 나는 어떤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아파트와 빌라, 전세와 자가, 외제차와 국산차 그리고 뚜벅이 아줌마를 봤다. 그저 아이들의 성적이 엄마의 가장 중요한 스펙처럼 느껴졌다. 마치 우리 모두 드라마 속 등장인물처럼 태어날 때부터 이런 캐릭터의 모습으로 살기로 결정된 듯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명품 꽃무늬 원피스에 장난감 같은 외제차, 늘 화장한 얼굴인 그녀들이 주인공처럼 보이고, 육아와 살림에 지친 나는 그저 동네 아줌마1같았다.


서글픈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어느 날,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던 그녀와 우연히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어색한 대화가 이어지던 중 우리의 대화가 어느 한 순간 확 물꼬가 트였는데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그녀도 나처럼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며 20대를 보낸 X세대였다. 여러가지 변수로 우리는 지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어쨌든 잘나가는 그녀에게도 답답하고 고단한 일은 한 트럭이었다. 우리가 나눈 솔직한 대화는 힘이 있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기 위해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알 거 같았다.




나는 그 시절의 경험을 4부작 드라마 [하루키를 읽던 여자들]로 완성했다. 큰 딸의 도움이 컸다. 살벌한 비평과 눈물 나도록 감동적인 칭찬을 번갈아 구사하며 엄마를 조련했다. 드라마 대본 읽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쓸 때마다, 수정할 때마다 그걸 매번 읽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나의 당선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딸 보기가 민망하다.


"엄마, 이런 얘기 사람들이 안 좋아해. 알지?"


딸은 이런 말로 나를 위로한다. 맞다! 지저분한 방구석 아줌마 이야기를 누가 좋아할까. 결혼한 여자들 이야기도 초호화 재벌급 정도로 가줘야 사람들이 궁금한 것이고.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나의 필력이 많이 모자란 탓일 게다. 하하 자조적인 웃음이라고 해두자. 그래도 속상하다. 요즘 페미니즘 관련해 이슈도 많고, 뭐 좀 완성도는 떨어져도 은근 맨날 보던 드라마랑은 다르면서 넷플릭스 흉내도 좀 낸 거 같은 나의 대본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ㅜㅜ 그래도 불굴의 X세대 임지원은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드라마를 소설로 축약해 브런치에 올려놓았다. 추천 브런치북도 아니고, 라이킷은 아홉 개인데 정진경은 남편, 리케는 큰 딸이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친구인 명선영과 이 동네 이사 와서 만난 고마운 지인 yoons님은 내 글이 완전 거지 같아도 라이킷을 눌러줄 분들이니 하하 암튼 그 다섯 개의 라이킷을 제외하면 완벽한 타인의 라이킷은 총 네 개. 초라한 성적표(?)다. 그래도 한두 편이라도 읽고 라이킷을 눌러주신 분들까지 포함하면 나는 그것만으로 행복하다. 나의 이야기가 공감을 받았다는 게... 가슴 벅차다. 완독률이 높은 편이다. 읽기는 쉽다는 얘기다. 내 주제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글을 쓸 처지는 아니다.


1년 전에 쓴 글이라... 다시 읽어보면 문장도 흐름도 문제점이 많이 보여 브런치북 삭제를 여러 번 고민했지만, 그래도 그보다는 담은 이야기라도 전하고 싶어, 나의 죽어있는 이야기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해본다.

궁금하지 않나요? 우리들의 이야기.


[브런치북] 소설 하루키를 읽던 여자들 (brunch.co.kr)


하루키책.jpg 오랜 세월 ... 우리집에 용케 살아남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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