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년 만에 백화점 가서 산 게
고작 에코백이라니.

나는 코스트코 쇼핑 중독자였다.

by 임지원

지난 토요일, 시아버님 생신을 맞아 효도밥상 이벤트를 준비했다.

새벽에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전...! 을 부쳐 시댁으로 출발한 것

7년 사랑한 남자와 결혼하고 의외로 전 부치다 이혼위기를 맞았던 나다.

(*12화 코스트코 동태전의 페미니즘적 고찰 (brunch.co.kr) 참고)

이런 내가 전 부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솔직히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며느리로서는 예상치 못한 휴식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아들, 딸 그리고 사위 손자 손녀... 며느리까지 한꺼번에 만나 뜨겁게 가족애를 나누길 열망하시는

시어머님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결혼 20년 만에 날 구원한 것은 정부가 내린 집합 금지 명령! 그렇다고 코로나를 환영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불행 중 다행? 부수적인 '개이득' 정도의 의미다.

어쨌든 휴식이 업무 능력을 높인다는 것은 진리였다. 나는 며느리로서 휴식을 누렸기에 뭔가 책임을 다해야 할 순간이 오자 의욕이 생겼다. 최선을 다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난 아버님 생신 음식을 무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준비한 것이다!


주말이라 길은 막혀 조바심이 났지만, 그래도 10시, 도착하기로 한 시간에 딱 맞게 시댁에 도착해 상을 준비하고 조금 늦은 아침을 먹었다. 가장 공을 들인 양지 미역국은 싱거워서 속상했다.

역시 담대하게 소금을 팍팍 넣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와규로 만든 육전을 파채와 함께 소스(식초, 간장, 설탕 1:1:1+고춧가루, 다진 마늘)에 찍어 드시게 준비한 게 나름 히트를 친 거 같다. 접시가 금방 비어 또 채우고 또 채우고... 기분이 좋았다. 우리 가족과 아버님 어머님과의 식사는 조용하고 아늑했다. 아들 딸 사위 손자 손녀들까지 요란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며느리로서 존재하는 기분은 왠지 뭐랄까... 콩쥐가 된 기분이랄까? 결혼 20년이 됐는데도 그렇다. 그런 기분이 안 들고, 어머님과도 더 깊이 소통한 거 같아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


그렇게 오전 식사를 마치고 아버님의 이야기도 듣고 하다 보니 12시 반이 지났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야겠다고 말씀드리자 아버님 아쉬운 듯 "가게?" 하신다. 조금 있으면 다른 식구들이 도착할 텐데...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현재 코로나 상황에 대한 위험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집을 향해 출발하자 눈앞에 딱 제2 롯데월드가 보인다. 코로나만 아니라면...

한참을 달리자 용산 아이파크몰이 보인다. 코로나만 아니라면...

이제 신촌 현대백화점이 나올 차례다. 아... 생각할수록 오늘이야 말로 백화점에 가기 딱 좋은 날이 아닌가?

남편은 주차하기 힘들고, 복잡하다고 그냥 집 근처 아웃렛에 가자고 하지만

그래도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이렇게 집을 나왔고,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해 새벽밥을 한 나로서는

그에 따른 어떤 보상 차원의 소비? 그런 걸 해볼 찬스를 잡았달까? 큰 아이도 무조건 가겠다고 난리다.

그 아이도 엄마 아빠와 함께 백화점 와본 지 얼마만인가 말이다.


정말 힘들게 주차를 하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별천지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많이 초라했다. 당연했다. 새벽에 일어나 밥 하고, 시댁에서 밥 먹고, 치우고, 차에서 졸다 갑자기 백화점에 들어왔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도 다행히 막내 초등학생이 부산스럽게 까불어주어 우리는 나름 단란한 가족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제 뭘 사야 하는데... 도무지 뭘 사야 할지 감이 안 오는 거다. 큰 애가 레인부츠를 사겠다고 해 매장을 찾아보니 없었다. 요즘 핫 하다는 젤리슈즈를 사겠다고 해서 찾아봐도 없었다. 신발을 파는 곳을 헤매다 보니 눈에 띈 크록스 매장, 가격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날 마침 막내가 신은 크록스는 코스트코에서 31000원을 주고 산 것인데, 백화점에서는 6만 원이 넘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물론 우리 애 신발보다는 색깔은 좀 더 화려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격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나다니... 병행수입, 병행수입 말로만 들었는데, 그게 뭔지 확실하게 알 거 같았다.


이번엔 막내 원피스에 어울릴만한 단화 스타일의 운동화를 사려고 보니 6만 원, 9만 원! 코스트코에서는 애들 운동화.. 비싸 봐야 3만 원일 텐데... 영 캐주얼 코너에 귀여운 스마일 그림이 그려진 T가 한 장 걸려 있어 큰 아이에게 사줄까 하고 보니 18만 원... 8만 원이라고 해도 놀랄 판인데 18만 원이라고?

나는 이 T의 가격표에서 18만 원을 확인한 시점부터 뭔가 뭘 사야겠다는 의지가 확 꺾였던 거 같다.

무슨 브랜드였는지도 모르겠다. 스누피 그림과 색깔이 화려한 캐주얼한 옷들이 요란한 매장이었는데.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멍해지고, 그 수많은 매장에 걸린 어마어마하게 많고 다양한 옷 중에 내가 입을만한 옷을 찾고 입어보는 노동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내 역량으로는 절대 풀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경우의 수를 찾는 수학 문제, 그런 느낌! 나 이 쇼핑 포기하겠어.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쇼핑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은 바로 코스트코라는 것을...!!!


지친 우리는 집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 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층에 내렸다.

아마도 남편이 주차장 연결 통로 그런 것에 맞춰 우리에게 내리라고 지시를 내린 모양이다.

딱 내리니 노란색 스마일 그림이 그려진 그릇, 소품, 유기농 수세미, 나무 도마, 빈티지한 컵, 접시들이

빼곡히 진열된 어떤 매장이 펼쳐졌다. 와...! 나는 2개씩 담아 1000원 가격표가 붙은 노란색 스마일 냉장고 자석과 15000원짜리 순면 100% 스마일 에코백을 집어 들었다.

이런 건, 코스트코에는 절대 없지!

확신에 차 물건값을 계산하는 그녀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생활용품으로 가 설거지하다 실수로 깨트려 짝을 잃은 밥그릇에 국그릇 새 짝을 찾아 구매하고

지하 식품코너로 내려가 닭강정과 줄 서서 산다는 시나몬롤, 앙버터 빵 같은 주전부리를 에코백에 담았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곧장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주차장을 빠져나와 신촌 사거리, 광흥창 사거리를 지나... 비로소

강변북로에 진입하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백만 년 만에 백화점에 와서 산 게 고작 에코백이라니...


"이 닭강정 맛있다. 엄마 입에도 넣어줘라!"

"시나몬롤은 맛있는데, 명란 바게트는 종이장 씹는 거 같아!"

"백화점 이제 절대 안 올 거야!!! 차라리 산 갈래! 아빠 목 막혀, 바나나 우유 사줘!"

"저기 편의점에 세울 수 있어?"

"잠깐만, 세울 테니까 기다려!"

"아빠 마스크 쓰고 가야지!"

"아차!!"



플라맹고_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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