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둘이고 올해 쉰인데 라떼파파 가능할까요?

Z세대딸과주3회페미니즘영화에와이우먼킬시즌2까지 보면 일어나는 일

by 임지원

7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남편은 가부장이 철철 흘러넘치는 가정에서 외동아들로 자랐다.

그가 다녔던 학교는 남중, 남고, 대학도 공대. 여동생과 누나, 그리고 교회를 다니며 소통한 자매님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남자들만의 어떤 문화가 그의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언젠가 인기 아이돌 그룹의 가수가 솔로 데뷔를 해서 노래를 했던 거 같은데, 그녀는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긴팔 셔츠와 긴 팬츠.


"기본이 안돼 있네..."

"뭐? 그게 뭔 소리야?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어쩌면 남자들 사이에서는 먹힐만한 농담이었을지 모르지만 나한테 엄청 구박을 받았다.

이후, 그는 또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입은 여성이 TV에 나오기만 해도 그는

나에게 구박을 받는다.


"왜 또, 기본이 안돼 있다고 하려고?"

"... "


Z세대인 딸은 나보다 더 하다. 아빠가 TV를 보다 생각 없이 여배우의 외모를 지적하거나, 비교하면


"아빠,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아빠 진짜 큰일 나."


오래전 그 아이가 고등학생 때 일인데, 아빠와 외출을 하고 돌아와 이런 말을 한다.


"아빠랑 다니면서 느낀 건데 사람들이 아빠한테 존댓말을 하더라. 아까 그 편의점 직원도 그렇고

나 혼자 다니면 대부분 나한테 반말을 해. 아빠 같은 성인 남성은... 나 같은 여고생이 겪는 힘든 거

절대 모를 걸..."


"뭔 소리냐? 아빠도 힘든 거 많다! 원래 다 그런 거야!"


그냥 공감을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 딸이 만든 아빠의 별명은 '아니야 곰'. 뭐라고 하든 일단 '아니야'라고 하는 그놈의 성격으로 얻은 게 뭐가 있나! 소중한 걸 잃고도 모를 인간이다.


벌써 몇 년 전 일이 됐는데,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화제가 되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과

이에 반대하는 어떤 세력(?)이 거칠게 갈등하며 한동안 시끄러웠을 때 우리 집도 비슷하게 혼란스러웠다.

82년생 김지영이 바로 72년생 임지원이었다. 판에 박은 듯 똑같은 명절의 시댁 풍경.

그동안 너무 힘들다고 말해도 귓등으로만 듣고 있던 남편에게 나는 비로소

큰 소리를 뻥 칠 수 있었다. 이거 봐! 이게 사람 미치는 일이라잖아. 가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남편을

데리고 극장으로 가 영화 관람까지 했다. 김지영이 친정에 가려는 순간 결혼한 딸들이 집에 들이닥치는

바로 그 장면에서 내가 눈물을 흘리니 초등학생 둘째까지 아빠를 째려본다.

82년생 김지영이 몰고 이 바람은 우리 집에도 거센 풍랑을 몰고 왔고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다.

고단한 과정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남편을 설득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한 느낌이다.

남편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왜 그렇게 고집스러웠냐고 묻자 남편은 우리 집보다 더한 집도 봤고 원래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단다.

일 년에 몇 번 네가 그냥 견뎌주면 다 행복하니까 모른 척했다고 너무 오랫동안 마음 몰라준 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가 사과를 하면 마음이 풀릴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진 않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참았다

발버둥 쳤다 했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면서 왜 이렇게 화가 나던지... 솔직히 나도 내가 한번 참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참기도 했다. 참은 줄 알았는데, 그게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사소한 어떤 부분에서

느낀 억울한 마음이 결국은 나의 분노를 표출하는 마중물이 되고 말았다.


이제 중년이 된 X세대에게도 버거운 이 희생을 효율과 합리를 따지는 MZ세대에게 강요할 수가 있을까?


딸은 초등학생 때부터 명절 때마다 엄마의 눈물 수발을 들었고 부부싸움의 목격자, 중재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결혼 후 자신이 걸어갈 인생길 그러니까 임신 출산 양육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대학교 입학 후, 도서관에서 나를 위해 대출해온 책도 엘리자베트 게른스하임이라는 독일의 할머니 사회학자가 쓴 그런 내용의 책이었다. 다 읽고 깜짝 놀랐다.

오래전 얘기인데, 지금이랑 비슷하구나! 유교 사상 때문에 우리만 더 그런 것도 아니었다. 독일은 더 했다!

독일의 경우 근대화 산업화되는 과정 속에서 여성은 집에서 남편에게 속해 집안일을 하며 아이들을 양육하는 엄마의 역할이 국가 발전에 매우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철학자들이 여성에게 모성애와 순종, 복종을 강요하는 말을 많이 하셨다.


'남성의 행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의미하며, 여성의 행복이란 남성이 원하는 것을 뜻한다.' 니체가 한 말이다.

'그가 너 없이는 더 이상 살 수 없고, 네가 떠나자마자 자기 자신이 멀리 떠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확고하게 그 사람의 일부가 되어라.... 네 남편이 집에서 행복하게 살 때, 네가 행복한 아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사회시간에 들어본 그 루소의 [에밀]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여성을 집 안에 가두고 남자의 부속품으로 생각하며 출산과 양육에 대해 무거운 부담만 주는 것은 출산율을 높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양한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제시한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는데, 바로 스톡홀름의 라떼 파파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결국 남편이 라떼파파가 되어야 한다는 것. 물론 라떼파파가 되기 위해 사회 고용 시스템의 변화와 인식의 전환과 같은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설명도 나와 있다. 솔직히 그거야 뭐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이 아닌가!


여성 인권에 관련된 뉴스가 나오거나, 특정 드라마에 어떤 문제적(?) 장면이 등장하거나 하면 우리 집 식탁은

100분 토론급 담론이 펼쳐진다. 여성의 쪽에 서서 강성 주장을 펼치는 나와 아이들에 비해 항상 중간 어디쯤에 위치할 때 마음이 편한 남편은 너희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 정황 상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논리를 펼친다. 하지만 그동안 여성 인권 관련된 수업도 듣고 책도 읽고 심지어 넷플릭스를 통해 설득력 있는 스토리를 접하며 더욱 견고한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된 딸은 아빠만큼은 반드시 설득하고 말겠다는 듯 반박을 한다. 대충 그렇다 네 말이 맞다 하면 될 거 같은데, 남편 끝내 동의하지 않고 '하지만! 그렇지만! 그런데!'를 외친다. 제발 '그런데'를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겠다고 하는데 말을 하다 보면 결국은 그런데!

역시나 중간 어디쯤의 주장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아빠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딸의 얼굴이 속상해보인다.


"아빠는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꼭 라떼파파가 될 남자를 찾아서 결혼해라..."



얼마 전 남편의 재택근무가 이어지며 출퇴근 시간이 세이브되는 바람에 저녁을 먹고 가족이 모여

영화를 한편 씩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첫날은 [에놀라 홈즈]. 이건 이미 본 영화다.

둘째 딸이 책을 읽으며 또 보고 싶어 졌다고 하는 바람에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또 얼마나 페미니즘적인 영화인가!


'당신은 권력 없이 사는 인생이 어떤 건지 모르기 때문이죠.

당신은 세상을 바꾸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본인에게 이미 딱 좋은 세상이라서...'

에놀라.jpg

에놀라 홈즈 책 시리즈를 수차례 완독한 둘째 딸까지 아빠 귀에 딱 붙어 조잘거리기 시작한다.

에놀라가 여학생 기숙학교에서 도망친 후, 동생을 찾는 셜록에게 나이팅 게일이 하는 말이란다.


"왜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여성들이 툭하면 기절하는 것 같나요? 출산은 말할 것도 없고 왜 가벼운 병으로도 죽는 것 같나요? 때론 출산 연령 전에도 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것 같나요? 이게 다 중국 여성의 발을 묶던 관습과 다를 바 없는, 허리를 압박하는 미개한 관습 때문이에요!"


영국의 '코르셋'문화 때문에 왜 남편이 혼나는 분위기지? 나는 그가 느낄 억울함에도 공감을 한다.


다음 날은 큰 딸이 넷플릭스에서 너무너무 재밌는 고전 영화를 봤다며 틀었는데 바로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스텝포드 와이프]였다.


오래전 아마도 페미니즘이 화두가 아닌 시절에 나와 남편은 이미 이 영화를 봤다. 남편은 본 영화라며 다른 걸 보자고 했지만,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 영화의 결론을 기억해내지 못했고, 딸은 자신이 추천한 이 영화를 보고 아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너무 궁금하다며 애걸복걸했기 때문이다. 다시 보니 결혼 이후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 적나라하다. 남편이 감당할 수 있는 페미니즘이 한계에 도달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에놀라 홈즈를 읽고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인 여성을 지칭하는 서프러제트라는 단어를

알게 된 둘째 아이가 호기심에 이것저것 검색을 하던 중 우연히 영화를 한 편 찾아낸 것이다.

바로 영화 [서프러제트]. "언니, 아빠, 엄마, 이 영화 꼭 봐야 해! 에놀라 홈즈 엄마도 나온다고!!!"

그렇게 또 한 편의 페미니즘 영화를 온 가족이 함께 보게 됐다...


영화는 20세기 초, 영국 여성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내했는지를 말하고 있다. 심지어 실화였다. 왜 이토록 가혹했을까? 이 가혹한 역사가 그 오랜 세월 지속됐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저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아빠, 너무하지 않아?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고작 선거권 하나 주는 게 싫어서? 게다가 이거 고작 100년 전 즈음 있었던 일이야. 500년 전 일도 아니고..."


실화가 가진 힘 때문이었을까? 남편의 마음이 흔들렸다.


"뭐 그런 가보다 했는데, 너무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


물론 남편의 지금 생각이 영원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는 적어도 반대편에 서 있지 않겠지만 중간 어디쯤을 주장하는 그만의 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TV를 보다가 또 "기본이 안돼 있네!"와 같은 농담으로 또 나를 실망시키겠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아니 어쩌면 큰 성과일 것이다.


"아빠... 목요일 밤에 우연이 자고 나면 와이 우먼 킬 시즌2 같이 보기로 했다. 알지?"



우리 집 페미니즘은 늘 한도 초과 상태다! 혹시 이러다가 우리 남편, 귀신한테라도 홀린 듯 이러면 어쩌지?


"저... 딸이 둘이고, 올해 쉰인데 최근에 문득

죽기 전에 한번 라떼파파가 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능할까요?"


"두 딸 중 유모차에 태울 수 있는 아이가 있으신가요?"


"첫째는 대학생이라 안되고, 둘째가 초등학생이긴 한데, 그 아이도 유모차에 태우긴 힘들 거 같아요..."


"땡! 불합격입니다!"


그 시절 우리 X세대가 사랑했던 가수 변진섭 노래가 떠오른다.

'너무 늦었잖아요~ 라테 파파 되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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