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작가 Jan 09. 2020

헤밍웨이 바? 압생트? 그냥 앉고 싶었어요.

회사 안 가고 동유럽 가기-8

 비셰흐라드를 갔다 오는 길이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20분, 둘러보는데 30분, 내려오는데 20분, 다시 구시가지 쪽으로 오는데도 30분 정도 걸린 듯했다. 걷기에 좋은 날씨였고, 프라하는 웬만하면 도보로 모든 곳이 이동 가능했다. 물론 나처럼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동 가능'하다는 상한선의 폭이 크다. 그런데 하루 종일 걸어도 너무 걸은 탓일까. 비셰흐라드 위에서 바라보던 노을에 취해 있을 때는 모르던 피로감이 몰려왔다. 까를교 밑에는 배를 탈 수도 있고 배 위에 분위기 좋은 펍도 있다. ( 왠지 들어가기 어려웠던 펍이라 다음에 꼭 가보고 싶다. ) 그곳을 한참을 걷다 드디어 구시가지 쪽에 다다랐을 때쯤, 오랫동안 앉아서 쉴 곳이 필요했다. 있던 자리에서 주변 펍을 검색했다. 여러 곳이 나왔지만 가장 평이 좋았던 곳은 'HEMINGWAY BAR'였다. 그래 여길가자. 늦은 저녁에 재즈 공연을 예약해놔서 시간을 보내며 어디든 앉아서 쉬어야 했으므로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도착하자 어떤 여자분이 문 앞에서 몇 명이냐 묻길래, 한 명이라고 답하자 바 테이블이 괜찮냐고 물길래 좋다고 답했다. 그때 나에게는 바 테이블인지 바닥인지 중요한 게 아니라, 앉을자리가 있는지가 중요했다. 자리를 잡자마자 바텐더가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한 뒤 메뉴를 정독했다. 한국에서 어느 펍에 들어가든 적어도 수십 개는 넘어 보이던 메뉴와는 다르게, 메뉴 이름만 간결하게 적혀 있는 칵테일 메뉴판이었다. 무슨 맛일지 상상하며 한참을 정독 후에, 체리가 들어간 익숙한 이름의 메뉴를 주문했다.



첫 번째 칵테일. 달달하고 맛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자리가 있었지만 바 테이블 근처는 굉장히 협소했다. 말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주변 사람들 대화를 모두 엿들을 수 있을만한 크기의 공간이었다. 칵테일을 홀짝이고 있는 나에게 바텐더가 웃으며 맛있냐고 묻길래 짧게 좋다고 답했다. 뭔가 좀 더 좋은 표현을 해주고 싶었지만 언어의 한계에 부딪혔다. 유난히 영어가 잘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인간의 언어는 감정을 전달할 때 가장 아름답지 않은가. 고작 'good' 같은 단어로는 만들어준 노고와 친절함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에는 굉장히 아쉬웠다.


 달달한 칵테일을 마시자 힘들어서 지쳐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바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누군가와 함께였고, 다들 비슷한 종류의 술을 마시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술이 헤밍웨이가 즐겨 마신다던 '압생트'라는 술이었다. 혼자 있어서 당연히 마셔보진 못 했지만, 알아보고 가지 않으니까 유명한 걸 보고도 유명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그 바에 있을 때 비엔나에 입성했을 때 경험한 생경함을 다시 느꼈다. 여행의 끝무렵이었어서 유럽에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이국적인 건물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유난히 '아, 여기 프라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었다.  



두 번째 칵테일. 진심으로 살면서 마신 것 중 가장 맛있었다.


 프라하 밤 특유의 낭만과 흔히 상상하는 젠틀하고 멋진 서양인에 대한 환상을 모두 뭉쳐 하나로 만든다면 이 bar가 될 것만 같은 곳이었다. 프라하는 물가가 저렴하지만, 이곳은 유명한 bar 답게 그다지 저렴한 편은 아닌 곳에 속했다. 그렇지만 한 잔만 마시고 나가기에는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쉬웠다. 한 잔을 더 시켰다. 블루베리 앤 바닐라. 뭐 이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블루베리의 달달함과 바닐라의 쌉싸름한 향이 정말 조화로웠다. 바텐더가 또 괜찮냐고 물었다. 선택한 단어는 여전했지만, 엄지손으로 더 큰 감동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 마음이 전해졌는지 웃어줬다. 이곳이 더 좋았던 이유는 바텐더가 보기 드물게 친절했다.



재즈 리퍼블릭. 무료 재즈 공연 보러 간 날.



 저녁 늦게 예약해뒀던 재즈 공연을 보기 위해 bar를 나오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나중에 안 두 번째 사실은, 이곳이 현지인들도 예약하고 갈 정도로 유명한 bar였다는 것이다. 프라하에 혼자 갔다 온 사람들 중 외로웠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곳에 갔다 오니 유독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이 낭만과 분위기를 혼자 즐기기에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이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고 '재즈 리퍼블릭'으로 향했다. 30cm 정도 되는 거리의 눈 앞에서 연주하는 멋진 재즈 공연을 마지막으로 프라하의 밤을 마무리했다.


 헤밍웨이에게 영감을 받아 악생트를 팔았는지, 그래서 펍 이름이 헤밍웨이 바였는지도 전혀 몰랐던 상태로 찾아간 펍이었지만 프라하의 마지막 밤은 그곳 덕분에 훨씬 아름다웠다. 역시 어쩌다 마주친 우연은 언제든 생각하지 못 한 크기의 행복을 준다. 혹시 언젠가 프라하를 또 간다면, 이 bar만큼은 꼭 다시 가고 싶다. 한 도시에 되돌아가고 싶은 공간이 생겼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떠날 이유가 충분하다. 다만, 멋진 칵테일에 걸맞는 멋진 표현으로 보답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가 가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얹어보기로 한다.









이전 08화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airport ( 볼트 이용기 )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