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6
해가 뜨는 걸 보며 아침을 먹고 싶었다. 구름이 전부 걷히진 않았지만 틈새기로 비친 여명이 멋있다.
저 멀리 큰 산이, 햇빛을 받아 빛을 내는 나무가 왜 이리도 멋있는지 모르겠다.
큰 계획만 있고 세세한 루트는 없는데 어젯밤에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서, 계획이 없다. 아무 해변가에 멈춰서 여행지를 찾아본다.
프레이시넷 구역의 와인글라스 베이다. 여기 또한 사진을 보고 별 기대를 하지 않은 곳이다. 사진이 어찌나 밋밋해 보였는지. 그런데 호주는 어딜 가든, 가면 좋다. 가면 가슴이 벅찬다. 가슴이 탁 트이고, 알 수 없는 전율이 인다. 별 감흥이 없었는데 진짜 멋있다. 끝내주게 멋있다.
걸으면서 주책맞게도 나는 가끔 울먹인다. 왜 이렇게 멋진 거야. 이 풍경이 왜 이렇게 멋진 거야. 이런 곳을 누릴 수 있는 이 여행이 왜 이렇게 멋진 거야.
허니문 베이에 들러 점심을 먹는다. 요즘엔 바다가 내 식당이다.
케이프 트루빌이라고 등대가 있는 곳인데 등대 바로 앞으로는 갈 수 없었다. 주차를 하고 어제 캠프 사이트 옆에 차를 대놓았던 친구들을 만났다. 파크패스가 있는 만큼 여행 루트가 비슷한가 보다. 어디로 가는지 물었는데 다음 행선지가 같다. 베이오브파이어? 씨유!
등대의 감흥은 없었는데 풍경의 감흥은 엄청나다. 마치 동양화를 내 눈앞에 가져다 놓았나 싶을 정도로 차분하고 고혹적인 색채다.
비체노라는 도시를 잠시 들렀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였는데, 화장실 앞도 왜 이렇게 멋있지?
오늘 내 하루는 약간 어수선했다. 어떻게 씻지. 내일은 어딜 가서 자지. 아직 정해놓지 않았다. 발길 닿는 곳이 곧 행선지가 되어가고 있다. 벤치가 보이는 곳에 잠시 멈춰서 밀린 일과를 정리하기도 했다. 여행 기록은 특히 바로 적어둬야 나중에 제대로 꺼내볼 수 있어서 소홀히 하면 안 된다.
베이오브파이어는 이 바위들이 마치 불타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딱 정해진 행선지 없이 이 바위들이 있는 구역을 그렇게 부르는 듯했다.
지금 걱정거리가 많아서 깊은 기쁨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 걱정은 여행에선 절대 떼어놓고 와야 할 방해꾼이다.
저녁을 먹고 샤워하기 위해 샤워장을 찾았는데 전면 오픈된 샤워장을 만났다. 하하. 다행히 그 옆 화장실 세면대가 큰 덕에 머리를 얼추 감았다. 돈 내고 갈 수 있는 샤워장을 가면 되지만, 그냥 로드트립 여행자라면 이 정도 불편함을 감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오늘 내내 걱정하던 샤워를, 이렇게라도 마치고 나니 기분이 아주 홀가분하다.
캠핑 사이트는 꽉 차 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데이유즈 공간에 차를 댔다. 오늘 내내 뭔가 이래도 되나? 민폐 행동들을 하고 다닌다. 호주에 놀러 온 어린 여행자를 가엽게 여겨주시기를.
이런 여행을 하며 지금껏 너무 편하게만 여행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 여행은 진짜 너무 열악한 환경이다. 돈을 주면 절대 할 수 없는 여행이다. 텐트도 없고, 침낭도 없고, 부르스타도 없는 차박 여행. 오늘은 어디서 씻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여행. 차 시트가 그리 편하지 않아서 잠을 자도 그리 편하지 않다.
하지만 정말 값지다. 이 여행을 통해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다. 나는 24살에 사회에 나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 나이가 너무 일렀다. 돈이 없을 때 해볼 수 있는 경험을 해보지 못하고, 돈으로 하는 경험만을 최고로 여겼던 게 아니었나?
여행을 많이 다녀봤지만, 이런 여행은 처음인지라 여행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을 완전 새로이 하게 됐다. 상황에 처해졌을 때 진짜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비치타월, 셔츠, 요가매트로 창문을 가리고 창문 하나로 차 안에 빛을 들이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았다. 잠깐 나왔더니 풍경에 말문이 막힌다. 요즘 깨달은 인생이 그렇다. 360도로 볼 수 있는 걸 창문 하나로 보고 있었다. 이 창문으론 밝은 구름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차 밖으로 나오니 이런 멋진 풍경이 있다. 차 안에서 대충 가림막을 떼고 보던 풍경과도 또 다른 풍경이다. 나는 그러니 바깥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싶다. 이런 풍경을 많이 누려봤으면 해서. 경이로움을 함께 만끽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