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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배 Zoe Oct 20. 2023

호주에서 할머니 친구에게 배운 것들

23-03-27


나는 시드니를 떠나기 전 소피가 마지막으로 오픈한 쉐어하우스에 들렀었다. 그런데 단체 숙박객이 있다고 하는 바람에 소피는 부랴부랴 렌트를 하나 더 받았다. 내가 도착하던 날 그 집을 받게 됐다. 아니었더라면 교육차 오신 숙박객분들이 여러 숙소로 갈라져야 해서 불편했을 텐데 너무 잘된 일이라며 소피는 기뻐했다.

 

소피는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다. 너무나도 건강했던 소피였건만, 요즘 많은 일을 손에서 놓고 집에 있다. 원래 같으면 너무 바빠 소피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려웠는데, 그 덕에 소피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불행스러우면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소피는 본인의 이익이 아니라 선을 위해서라면 되게 하고 만다. 이번 렌트는 선을 위한 일이었기에 컨디션이 좋지 않은 요즘이었건만 온 힘을 다해 렌트를 받아냈다. 소피는 우리가 빨개 벗고 나와서 옷이라도 입고 있다는 말을 했다.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소피는 벌어지는 돈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소피는 5센트, 10센트 이런 사소한 돈조차도 스스로가 잘 쓰이는지를 아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돈에 눈이 있고 귀가 있다고 느낀다고. 돈이 의미를 잃으면 쓸데없는 종잇장이라고 했다. 낙서도 못하는. 돈이 길을 잃으면 악마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의미를 가진 돈은 아픈 사람을 살리고, 배고픈 사람을 밥 먹일 수 있다 했다. 소피는 그런 것들을 위해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산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소비를 줄이고 그걸 모아 돕는다.

 


원래 소피가 살던 방 6개짜리 집, 그 집은 사람들이 들어서자마자 입을 떡 벌리고 연신 사진을 찍어댈 정도로 화려했다. 2명이서 지내는데 유지 관리비가 정말 많이 들었다고 했다. 소피의 표현을 빌어 돈이 줄줄 새어 나갔다.

 

그것들을 소피는 아들네에 다 주고 이불만 들고 지금 집으로 왔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아주 큰 도움은 아니지만 다른 데서 받지 못할 도움을 주고 있다. 험난한 길에 있는 사람들을 돕곤 한다. 나만해도 그 도움을 받은 사람이기에 소피가 하는 일에 대한 대단함을 안다. 묵을 곳이 없다는 것만큼 서럽고 힘든 일이 없는 법이다. 소피는 그런 어려움을 해소해 주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소피가 복이 많은 사람처럼 보일지 모른다. 지금 운영하는 쉐어하우스 사업은 코로나가 끝나고 시작한 몇 개월 되지 않는 사업인데 벌써 규모가 엄청나다. 그런데 나는 그 복이 그냥 생겨나지 않은 거란 걸 안다.



소피에게는 신기한 이력이 하나 있다. 소피는 시드니의 어느 조그만 역사 앞에서 스시가게를 운영했었다. 소피는 원래 케밥가게였던 그곳을 헐값에 인수받았다. 전 주인은 집기류조차 돈을 받지 않고 모조리 두고 나갔다. 소피가 운영하는 스시집은 당연하게도 성업을 이루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가곤 했단다. 소피가 혼자 운영하는 1인 매장이었다. 하도 영업이 잘 되니 소피를 쫓아다니며 가게를 팔아달라는 제안도 있었다.

 

소피는 아들네가 차일드케어를 부탁해 가게를 넘겨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가게에 불이 났다. 들어 놓은 보험이 있어 그걸로 보상을 20,000불을 받았다고 한다. 소피는 결국 그 가게를 내놓으며 권리금을 몇 배 이상 불려 팔았고, 집기류 또한 판매해 고스란히 수익으로 가졌다.

 

소피에게는 이렇게 운이 따르고, 또 따랐다. 그 이유를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소피의 아들네는 스시집이 성업을 이룬 것에 대해 소피가 음식을 판 게 아니라 마음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피는 영업 마감 1시간 전이면 파격 세일을 단행했다. 이 정도는 어느 스시집이나 마찬가지지만, 어린아이들이 오면 공짜 음료를 내어주고 그 부모에겐 스시를 더 저렴하게 팔기도 했다. 소피의 머릿속에 계산이라곤 전혀 없었다. 소피의 마음이 시켜서 그렇게 한 일이었고 소피는 정말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했고 사랑했다.

 

이 모든 일련의 소피의 모습이 과정처럼 읽히겠지만 쉐어하우스에서 지내는 나에겐 한꺼번에 물밀 듯 밀려들어왔다. 그런 소피의 자비로움과 너그러움, 간단함과 즐거움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 또한 가득 차오른다. 그러면 난 소피의 쉐어하우스에서 내내 사랑의 품에 안긴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낼 수밖에 없어진다. 난 처음에 소피가 나를 특별히 예뻐한다고 느꼈으나, 소피는 모든 이들을 그렇게 대했다.

 

며칠 전에는 아쉽게도 소통에 오류가 생겼다. 렌트한 집의 키를 받아야, 한국에서 막 도착한 분들이 새 쉐어하우스에 갈 수 있는데 뭔가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남는 방은 없고 사람들은 도착한 애매한 상황이었다. 소피는 현명하게 그 상황을 대처했다.

 


하루만 거실에서 묵는 대신 몇 가지 편의를 제공해 주고,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다행히도, 일은 잘 풀렸다. 오히려 이제 막 한국에서 도착한 아저씨들은 소피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애들레이드라는 소도시로 가서 전문적인 일을 하실 분들이었다. 4-60대쯤 된 아저씨들이었지만 사실은 너무 두려웠다고 했다. 너무 낯선 이곳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가. 낯선 곳에서 너무나도 따뜻한 마음으로 반겨준 덕에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소피는 노스탤지어를 이야기했다. 소피는 호주를 사랑했지만 한국을 그리워했다. 고향에서 온 이들을 사랑했다. 만난 지 단 며칠 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사랑했다. 소피는 안 좋은 컨디션임에도 진심을 다해 노스탤지어를 노래했다. 그 노래를 들으며 몇몇은 눈물을 비쳤다. 소피의 진심이 와닿았다고 했다. 소피는 정말 그들을 응원했다. 진심으로 반가워했고, 응원했고, 사랑했다.

 


쉐어하우스를 오픈하던 날 아저씨들이 교육받는 동안 나는 소피를 도와 쉐어하우스에 이불을 옮기고 시트를 씌웠다. 조금 고생을 하고 점심으로는 끝내주는 양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또 삼겹살 파티를 했다. 소피는 여전히 아저씨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다들 소피에게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표했지만, 딱딱한 거실바닥에서 주무시게 한 점이 정말 미안하다고 그날 저녁은 소피가 완전히 책임졌다.

 

소피는 아직 컨디션이 나아지지 않은 몸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삼겹살을 굽고 사회를 보고 분위기를 북돋았다. 땀을 흘리며 고기를 구워 가져다주면서도 소피는 아저씨들이 와주신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나를 소피는 작가님이라고 설명했다. 커피 10잔을 가져가던 아저씨가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된다면 본인 이야기를 적어달라고 했는데, 타이밍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나는 소피의 집 소파에서 지낸다. 소피는 방을 따로 비워주지 못한 점이 미안하다며 저렴하게 지내게 해 줄 것처럼 말했었지만, 내가 시트를 갈고부터는 따로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일종의 숙식이 제공되는 숙박업 일을 하는 것처럼 됐다.

 


어제는 소피가 해준 된장밥을 맛나게 먹고, 소피의 쉐어하우스에 볼 일도 볼 겸 산책을 다녀왔다. 소피는 마음의 불꽃 덕분에 행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마음에 불꽃이 타지 않는 행복은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한 부분이라도 되어 주고 싶어 하면서 그것이 불꽃이 된다고 했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럼 행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소피와 며칠 아주 가까이 지내면서, 소피가 다른 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 또 많이 배웠다. 소피는 이제 곧 칠순을 바라보는 할머니지만, 스스로를 굉장히 많이 낮춘다. 자주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얘기한다.

 

소피는 스스로를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여겼다. 소피가 만나는 모든 이들이 영화의 한 장면에 남을 것이기에 그들의 장면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그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사는 주인공이 해야만 한다고 했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줘야 한다고. 대신 이 아름다운 장면은 뽐내는 장면이 아니라고 했다. 주인공을 뽐낼 필요가 없다. 이미 빛나고 있기 때문에. 빛나는 걸 덮을 건 없다. 티끌만 한 구멍이 뚫리면 빛은 발산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팔짱을 끼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했다. 호주에는 가을이 오고 있었고 그 밤의 기온은 마치 체온과 같이 느껴졌다. 나를 둘러싼 공기가 내 안의 온도와 다를 바 없었다. 소피는 그 공기가 너무 시원하다며 즐거워했다. 다가오는 겨울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들떴다.

 

소피에게 겨울의 기억은 20대 초반의 어느 날들에 머물러 있었다. 중앙대학교 앞의 다방, 빵집, 선술집, 대학교 정문 위에 달린 조명 아래로 소복이 쌓이던 눈의 근사함. 눈 오던 날에 다방 안으로 들어가던 소피의 모습이 얼핏 거릴 때면 그 지난한 날의 소피가, 나는 보지도 못한 소피가 그리워졌다. 소피는 내가 가면 많이 그리울 거라 했다. 나는 소피가 그 말을 꺼내기 전부터 그 순간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집에 걸어가며 집에 비친 나무 그림자의 근사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집들마다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 지에 대해 나누며, 소피가 좋아하는 창이 달린 집을 칭송하기도 했고, 불 밝혀진 집들의 따뜻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거의 매번 소피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노래했다. 정말 그랬다. 이 밤의 시드니 하늘엔 아마 지구의 일생동안 가장 아름다운 별이 빛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 멋진 날을 뒤로하고 나는 오늘 차를 처분했다. 속전속결로 처음 구매하러 온 구매자에게 차를 팔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가는 비행 편을 또 앞당겼다. 나를 이렇게 이끄는 불꽃의 힘이 무엇인지 이제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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