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9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던 나를 잠시 안정시켜 준 책이 있었다. 생각지 못한 문장들이 내게 와닿았는데, 그 문장이 내게 계속 남아있는 줄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지나온 어느 지점에서 계속 그 문장들을 곱씹었다.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변하게 됐다.
요즘 나는 나만의 매거진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미션캠프라는 곳에서 주제를 주면 나는 그걸 노션에 채워 넣으면 된다. 이번 주 주제는 인생 책, 노래, 영화에 대해 적어내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 지구별 여행자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책이었는지를 깨닫게 됐다. 나의 매거진 일부를 이곳에 소개하려 한다.
- 류시화 《지구별 여행자》
- 작품 소개 글
: 인생의 방향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했을 때 한 아이를 알게 됐다. 그를 만났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삶에 큰 영향을 줬다. 책을 좋아하는 그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좋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책이었고, 그가 그러했듯 이 책은 내게 어떤 방향을 알려주었다. 나는 이 지구라는 별에 여행을 온 여행자이기에 언제나 여행하는 기분으로 오늘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불평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으므로 바꿀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고통이 생겨난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배우는 것뿐이다. 행복의 비밀 또한 비슷하다.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보다 얻은 것을 기억하면 된다. 그렇기에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주시하며 바꿀 수 있는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의 여행에 대한 책임은 다름 아닌 지금의 나에게 있다.
내게 찾아왔던 모든 고통은 하나의 과정이었다. 내게 필요했기에 그 많은 일들을 일어났고 그것에 대한 불평보다 그것으로 나를 이끌어준 것에 감사해야 함을 알았다. 그 모든 것은 지금의 나를 위해 일어나야 했던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 길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 모든 고통 하나하나에도 감사하게 된다. 그것들은 이 여행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한 값진 보물들이었다.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다. 이곳이 호주라서가 아니라, 내가 인생이라는 여행 과정 중에 있다는 걸 언제나 잊지 않으려 한다. 지금 내가 여행 중이라면 어떤 곳으로 가야 더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야 이번 여행이 더 기억에 남을까?
소피가 오늘은 집 관리를 위해 우리 쉐어하우스에 들렀다. 그 덕에 나는 찔레꽃을 다듬는 소피를 보며 오늘치 여행의 의미를 찾았다. 소피는 마당에 핀 찔레꽃을 정리하다가도 노래하듯 시를 줄줄 읊었다. 소피는 플레어스커트를 자주 입는데 그 덕에 마치 찔레꽃 주변을 훨훨 나는 나비 같았다.
소피와 함께 지낼 때를 생각해 보면 소피는 설거지와 손바느질, 레몬주스 내리기 같은 소일거리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소피를 볼 때면 항상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모습이었고 그것에 얼마나 집중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한순간 노래를 부르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춘다.
소피가 그렇게 춤출 수 있는 이유는 책의 교훈과 같다. 소피는 정말 지금을 사는 사람이다. 그 어떤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과거에 대한 후회도 하지 않는다. 소피는 많은 사람들이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그건 나이를 먹는다고 자연스레 덜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70년 가까이 인생을 살면서,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해 세월을 그저 흘려보내고 마는 걸 자주 본다고 했다. 나는 과거에 지나간 과거를 자꾸 돌아보고, 오지 않는 미래를 자꾸 두려워하며 눈앞에 있는 현실을 갉아먹었다.
나와 소피에게 주어진 축복이 하나 있다면, 우리는 현재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전부 책이었다. 소피와 내가 급격히 가까워진 이유는 모두 독서 때문이었다. 소피는 고전문학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나도 책을 읽어가며 생의 순리를 알아가는 중이다. 여행을 하듯 매일을 보내는 마음 같은 것들을 말이다.
나는 지금에 서 있으면서 즐겁게 꿈을 꾸는 중이다. 즐겁게 행동에 옮기고, 즐겁게 공부하고,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여행한다. 모든 순간이 정말 소중해서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 여전히 오늘이 가는 게 나는 너무나 아쉽다. 내가 좀 더 좋은 시간을 보내서 미래의 나에게 큰 선물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놓친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난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삶이 나는 전혀 치열하지 않다. 이런 삶을 살면서 알게 됐다. 갓생이란 전혀 피곤한 게 아니었다. 열심히 사는 삶은 정말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 나는 너무 즐겁고 신난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달려가는 게 신이 나서 매일 속으로 폴짝폴짝 뛴다.
언젠가 나도 과거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일을 하고 집에 돌아가서 공부를 하고, 무언가 열심히 탐구하고 집중해서 어떤 성과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 피곤해 보였다. 워킹과 라이프의 밸런스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열심히 일 했으니 그에 따른 보상으로 나의 라이프를 즐겨야만 하는 건 줄 알았다.
막상 내가 겪어보니, 에너지가 끝도 없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나는 안으로, 바깥으로 계속해서 에너지를 충전받고 있다. 전에는 주유소에 가서 주유를 하듯 정기적인 휴식이 필요했는데, 어느 시점부터 나는 마치 자가 발전기를 단 것처럼 나아왔다. 사람들은 나를 응원하고 격려했고, 스스로 나를 독려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하면 그것에 따른 좋은 결과들이 끊임없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결과들이 보이지 않는대도 내 인생은 소중하다. 모두의 지금은 소중하다. 나는 완전히 망해버린 인생은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계속 걸어가는 중이고, 그 과정 중 어떤 배움과 시련의 지점에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지금을 살다 보면 그 시련의 인생조차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소피와 나는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는 걸 믿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세상 일이 그리 단순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러면 잘 풀릴 때는 기뻐하고, 뭔가 복잡할 때는 그저 묵묵히 해낸다. 무너지지 않고, 아무 불평 없이 그저 얌전히 해치운다. 그러다 보면 별로 힘든지도 모르게 시련의 시간들이 저 멀리로 달아나버린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원리를 마음속에 품고 있던 나는 조금씩 변했다. 나는 지구별 여행자를 읽고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 공무원을 그만뒀다. 그러고 나서 또 1년을 넘게 공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비로소 모든 불안함을 떨쳐내고 이곳 호주에 왔다. 그러니 2년 반이 걸렸다. 하지만 나는 확실하게 변했다. 조금씩 바뀌어 왔다. 정말 조금씩.
나는 소피를 보고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의 목표를 잡았다. 하루에 한 번은 즐거움에 절로 나오는 춤을 추기로. 소피는 찰나가 모여 풍성함을 이룬다고 믿었다. 마치 꽃다발처럼. 나는 그렇게 호주에서의 꽃들을 송이송이 모아 하나의 다발로 묶고 있다. 아직 만들어가는 이 꽃다발이 어찌나 향긋한지 벌써부터 나를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