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 (Der Wanderer)
https://youtu.be/dlEwuZDK5Qs?si=0vJV1wGkPLiex4vV
"밤 늦게 정말 죄송합니다. 좀 괜찮으세요? 사건에 진척이 없어서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시는 것은 알지만 밤늦게 찾아왔습니다."
헛기침과 함께 멍하니 어두운 6인실 안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말을 뱉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잠에서 깬 몇몇 환자가 짜증을 내며 투덜거리며 뒤척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렇게 너무 당황해하는 그 형사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꾹꾹 참으며 같이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어지러움도 덜해서 링거대를 끌고 다니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어휴~ 성질들이 장난 아니시네요. 하핫.... 다행인건 수술을 안 하셔도 된다는 것이죠. 일시적으로 기억이 안나시거나 그런건 아니시죠? 아아~ 저 기억나시죠?"
성격이 굉장히 급한 사람이구나. 내가 생각하는 험상궂거나 일주일씩 밤새고 꾀죄죄한 모습의 형사는 아닌게 신기하다. 아... 내가 형사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 걍 우리 동네 주민 같은데?
"...형사님이시죠?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내일이면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라는 내 말에 안도한 듯 그는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언제부터 쫓기는 기분이 들었냐, 그 낯선 사람의 인상착의가 기억나는 것이 있느냐, 당일 혹시 창문을 열어두거나 하지 않았는지, 둔기로 맞기 전까지의 기억나는 것을 다 이야기 해보라는 등.. 이미 푸른 수염 선생님의 이야기를 다 들었을테니 나는 내가 생각나는 모든 이야기를 그에게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아쉽게도 아직 뚜렷하게 나온게 없어 난관에 봉착한 느낌입니다. 범죄 수사 드라마 같은 것들이 워낙 흥행하다보니 범죄자놈들이 아주 지능적이 되어가고 있어요. 스토커 범죄인 것 같은데 단순 강도의 가능성도 있어서, 문제는 딱히 없어진게 없는 것으로 보여요. 혹시 댁 말고 어디 계실 다른 곳은 없으신가요? 가족분들은 지방에 계시다고..?"
일 때문에 내가 일반 병실로 옮기자마자 다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잠시 마음이 찡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지금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은 그 사람의 집에 그 아줌마와 아이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하룻밤을 지낼 수도 없는 것이고, 뭐.. 푸른 수염 상담 센터 쇼파라도 빌려달라고 해야 하나?
아무말 없는 나를 물끄러니 쳐다보던 형사는 쟈켓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신의 명함과 함께 건낸다. 위치추적 워치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 번호를 핸드폰에 1번으로 저장하라며 다른 사건도 많지만 특별히 신경쓰겠다며 이런 말을 남겼다.
"뭐... 저도 혼자여서요. 갈 곳이 그 곳 뿐인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니까요. 어차피 내일 퇴원하시면 바로 도어락을 교체하세요. 그리고 내일까지 회사를 쉬시는 거죠? 제가 연락드리고 방문해서 같이 점검을 한 번 해드릴께요. 집이 안전하지 않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방황하시면 안되잖아요. 혹시 너무 힘드실 것 같으면 호텔에서 하루 정도 지내세요. 암튼 내일 뵙죠. 아참! 그 푸른 수염? 의사? 그 분하고는 많이 가까우신가요? 어쨌든 지금은 주변분들 모두가 용의자니까요. 뭐 불안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구요."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제대로 만들고 형사는 홀연히 떠나버렸고, 나는 한참을 잠에 들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퇴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혹시나 불안한 마음이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편히 연락하라는 푸른 수염 선생님의 문자를 받고 이 모든 것이 기우였다는 것에 안도하고 퇴원 수속을 밟았고 그렇게 나는 조금은 다짐을 하였고 집 앞에 당도하였다.
결국 나는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짐을 잠시 경비실에 맡기고 여기저기를 방랑자처럼 돌아다니다 결국 형사가 올 때까지 근처 카페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머리에 큰 반창고를 붙인 것을 가리기 위해 벙거지 모자를 푹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수상해 보였던 것인지 힐끔힐끔 쳐다보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에 놀이터의 벤치에서 쫓겨나듯 카페로 간 것이지만.
그리고 형사가 짐을 집으로 옮겨준 것은 물론 열쇠수리공을 부르고 이것저것 대신 다해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 저녁까지 대접하느라 푸른 수염 선생님이 전화 온 것도 잊어버렸지만.
그렇게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또 며칠이 흘렀고, 나는 푸른 수염 선생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지란 생각만 가진 채 매일 확인 문자나 방문을 하는 형사에게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