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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Aug 17. 2020

#10 “사랑하겠다는데 나빠질 일이 뭐가 있겠어?”

사실은 사랑하는 사이 #10

연재 중이던 소설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2021.1.15)

<하는, 사랑> 출간을 알립니다. 

하는, 사랑




:: 연재소설입니다. 순서를 확인해주세요. ::

:: 19세 미만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있습니다. ::




#10


희수와 대화를 마치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다가 창가 선반에 놓인 식물에 눈이 갔다. 해가 유난히 좋아서인지 오늘따라 먼지를 뽀얗게 얹고 있는 식물들이 눈에 거슬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물수건을 만들어 와서는 잎의 앞뒤를 살펴 가며 한 장씩 닦기 시작했다.  


 “어떻게 집에 먼지가 이렇게 많지? 준서가 나부대서 그런가, 청소를 매일 안 해서 이런가. 이렇게 닦아도 며칠만 지나면 화초 잎마다 먼지가 다시 잔뜩 내려앉아 있다니까.”


남편 들으라는 소리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무런 대꾸가 없길래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빠, 대답 좀 하지?”


“아, 나한테 대답을 요구하는 말이었어? 몰랐지.”


“우리도 건조기를 살까? 이게 다 옷 먼지라는 얘기가 있더라. 건조기를 돌리면 거기에 옷 먼지가 어마어마하게 모인대. 보면 기절할 정도로. 그래서인지 집안 먼지도 되게 많이 줄어든다는 거야.”


“글쎄.”


여전히 건성으로 대답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희수가 말하는 권력에 대해서 생각했다. 15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살면서 나는 여태 부부 사이의 권력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있는 거라면 우리 집에서는 대체 누가 권력자일까.


남편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평일 낮에 집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스마트폰을 보다가 책을 보다가 하는 저 사람이 우리 집의 권력자일까? 아마도. 가장의 권위라는 건 크건 작건 있을 테니까. 그럼 남편은 자신의 권력을 인식하고 있을까? 아이한테는 몇 번이나 ‘우리 집에서 엄마가 제일 힘이 세잖아. 엄마 결정을 기다려 보자.’ 이렇게 말하곤 했지만, 그건 아이 앞이니까 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정작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준서는 자기가 이 집의 권력자라고 말할 거다. ‘엄마랑 아빠는 뭐든지 내 위주로 생각하고 결정하니까.’ 그러면서 깔깔 웃을 테지.


“결국은 돈인가? 부부 중에 돈을 버는 사람이 대부분의 권력을 가지는 거지.”


칼라테아 잎을 앞뒤로 반짝반짝하게 닦으면서 던진 느닷없는 질문을 남편은 용케 새겨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체로 그럴 것 같다고 했다.


둘 다 돈을 번다면 더 많이 버는 쪽일까? 아니면 더 힘든 일을 하는 사람? 아니면 결혼할 때 더 많은 돈을 보탠 쪽이 권력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많이 배운 사람은? 집안이 더 좋은 사람? 돈은 별개로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건 어때? 아니다. 보통 지위가 높으면 돈도 더 많이 벌겠지. 그렇다면 희생은 어때? 가족을 위해 희생이 많았던 사람이 그 집안의 절대 권력자가 되는 거지. 에이, 그럼 애 키우는 엄마들이 전부 권력자이게? 애 키우느라고 일도 관두잖아. 근데 일 관둬서 돈을 못 버니까 권력을 잃어. 이게 무슨 부당한 꼴이야? 근데 요즘에는 돈 버느라고 고생한다는 걸 무척 강조하는 것 같아. 결국은 돈 버는 게 제일 벼슬이네, 벼슬이야.


남편과 이런 얘기들을 하면서 글을 쓰겠다고 직장을 관두던 때를 떠올렸다. 영혼 없이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글을 쓰겠다고 했던 그때를. 나는 돈을 벌지 못하게 되면서 권력을 잃게 되었을까? 


남편은 어떨까. 회사를 관두고 종일토록 집에 틀어박혀 있는 나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남편도 일 년쯤 후에 회사를 관두었다. 전문지 기자였던 남편이 기고하는 만큼만 먹고사는 프리랜서의 삶을 선택하면서 줄어든 월급만큼 권력도 쪽박이 난 걸까? 그로 인해 권력 일부를 상실했다고 생각할까? 혹시 내가 그를 대하는 태도가 알게 모르게 바뀌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대하는 내 태도가 조금은 바뀌었다고 여길까?


나는 한 번도 권력이 없다는 것을, 혹은 낮다는 인식조차 해본 적이 없다. 돈벌이에서 손을 떼고 잘 팔리지 않는 책을 쓰는 작가가 된 나는 권력의 한 귀퉁이도 가질 수가 없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럼 권력이 있고 없고의 판단은 순전히 상대 배우자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 아닐까? 배우자가 나를 위해준다면, 그러니까 사랑해준다면 모든 조건에 상관없이 권력이 없다는 생각은 절대로 할 리가 없다.


“오빠, 섹스는 어때? 섹스도 권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맞을까?”


“아마. 어떤 남편이 있는데 섹스를 무지 잘해. 나처럼. 후후~ 하여튼 섹스를 무지 잘해서 부인이 진짜 매일 만족한다고 해 봐. 그럼 그 남자는 집에서 권력이 엄청나지 않을까? 왜 그런 얘기 있잖아. 밤일 잘하면 다음 날 반찬이 달라진다고.”


“나는 어때? 잘해? 섹스로 권력을 막 휘둘러도 될 정도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편의 뻔한 대답을 채근했다.


“그럼. 너는 온 세상의 권력을 다 끌어모아서 휘둘러도 될 정도야.”


“오빠, 희수네를 생각해봐. 정말 희수 남편이 희수한테 권력을 마구 휘두르고 있는 걸까? 독재자처럼? 근데 여태 라면도 자기가 끓여 먹었다는데 무슨 권력을 휘둘렀다는 건지 모르겠어. 물론 지켜본 게 아니니까 모르지만, 그냥 막연하게 생각해보면 말이야. 하지만 희수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있을 거 아니야.”


“일단, 남편이 희수 씨의 상사였고 나이 차이도 좀 있지. 그리고 혼자 벌어서 희수 씨랑 은성이가 경제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살게 해 주잖아. 근데 섹스를 안 해준다?”


나는 남편의 말을 막았다.


“왜 희수가 안 해줬다고 단정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 희수만 잘못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 그리고 돈 많이 번다며, 근데도 모든 씀씀이를 체크한다잖아. 생각만 해도 숨 막힐 노릇 아니야?”


“나도 얼마냐고 매번 물어보잖아. 그건 그냥 성격이라니까?”


“오빠가 물어보는 거랑은 달라. 오빤 모든 걸 다 물어보지도 않잖아. 친구 만나서 쓰는 돈이나 나 혼자 쓰는 그런 거까지는 안 물어보잖아.”


“희수 씨 한마디 듣고 백 가지를 다 물어본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것도 어느 정돈지 우리가 자세히 모르니까.”


“희수는 계속 언니가 알면 기절초풍할 일이 있다는 둥,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정작 무슨 일이 있는지 말을 안 하는데, 이 상태에서 계속 섹스하라고 조언하는 게 맞을까? 난 상담사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잖아. 내가 뭔가 잘못하는 거면 어떡해? 내 말이 다 맞는 것도 아닐 텐데 상황을 악화시키면 어떡하냐고.”


나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 것을 털어놓았다. 괜히 시도했다가 둘 사이가 더 틀어지는 일이 생기진 않을지 진심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네가 왜 조언해줄 역량이 안 된다고 생각해? 전문가들도 모두 섹스 잘하고 행복한 가정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어? 너는 경험이 많잖아. 뭐든지 십수 년쯤 한 사람은 전문가 아니야? 게다가 섹스 경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랜 세월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기까지 했어. 이 정도의 경험은 지식만큼의 힘이 있는 거야.”


“게다가 나는 희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있거든. 내 얘기가 도움이 되는 거 맞겠지? 그치?”


나는 내가 희수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필요했던 거다.


“걱정하지 마. 어찌 됐건 섹스를 시도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어. 부부간에 섹스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안 하는 게 문제지. 사랑하겠다는데 나빠질 일이 뭐가 있겠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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