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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Aug 19. 2020

#14 “도어록 소리만 나도 막 심장이 뛰는 거예요.”

사실은 사랑하는 사이 #14

연재 중이던 소설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2021.1.15)

<하는, 사랑> 출간을 알립니다. 

하는, 사랑




:: 연재소설입니다. 순서를 확인해주세요. ::

:: 19세 미만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있습니다. ::



#14

  

평일 오전의 쇼핑몰은 우리처럼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나온 듯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소리가 벽에 튕겨 울리는 소음이 오히려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나는 여전히 남편의 팔짱을 끼고 체중을 남편에게 반은 실은 채로 걷고 있었다. 희수가 어디에서 밥을 먹으면 좋겠냐고 묻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식사 장소를 정해 놓지 않고 만난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비교적 한산한 비빔밥집이 보이길래 남편과 희수에게 동의를 구했다. 


“더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오늘 형부랑 언니 밥 사주려고 나왔다구. 샤부샤부 먹을래? 언니랑 형부 그거 좋아하잖아. 여기 어디에 있을걸.”


“아니야. 아침을 안 먹었더니 배고프다. 비빔밥 맛있겠어. 형부도 비빔밥 좋아해. 은성이 유치원 마치는 시간도 생각해야지. 저기로 가자.”


큰 놋그릇에 나온 비빔밥을 비벼서 크게 떠먹으면서는 아이들 얘기만 했다. 남편과 내가 밥을 다 먹고 콩나물국까지 싹 비우도록 희수는 절반도 먹지 못했다.


“천천히 다 먹어. 시간 많아. 애 시간 맞추려면 너 또 점심도 못 먹을 텐데.”


“아니야 언니. 다 먹으면 나 소화 안 돼. 큰일 나.”


아닌 게 아니라 희수는 늘 내가 먹는 속도를 반도 못 따라왔다. 희수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작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천천히 먹어도, 내가 다 먹었을 때 희수가 자기 밥그릇의 반이라도 먹은 날이 드물었다. 희수는 식사 중간중간 그만 먹을 것처럼 숟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쉬었다가 먹는 일이 많았는데, 늘 그렇게 콩알만큼 먹는 것도 다 이유가 있던 거였다. 날씬한 애가 또 다이어트를 하는 건가 하였는데 이제야 알겠다.


비빔밥집에서 제일 가까이 있는 카페에 들어와서 커피를 한 잔씩 주문했다. 희수는 겨울에도 아이스커피, 나는 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다. 남편도 뜨거운 커피를 시켰다. 얼음이 조금 녹길 기다리던 희수가 시원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마음을 털어놓았다.


“지금이라도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완전 괜찮아. 솔직히 난 네가 말 안 하면 좋겠어.”


“아니야 언니. 얘기할 거야. 언니네 조언을 듣고 싶어.”


“알겠어. 그럼 복수하겠다는 건 뭐야? 남편이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네 입에서 복수 얘기가 나와? 바람피웠니?”


“바람까지는 아니구, 오피스 와이프 같은 사람이 있었어. 그걸 내가 은성이 임신했을 때 안 거야. 너무너무 충격을 받았지. 그때 처음 상담을 다니기 시작했어. 병원은 아니고 상담센터에.”


“뭐? 오피스 와이프? 오피스 허즈번드, 오피스 와이프, 이런 혐오스러운 단어를 대체 누가 만든 거라니? 다들 회사에서 뭣들 하는 거래?”


나는 열부터 냈다. 


“희수 씨,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잠자코 있던 남편이 물었다.


“제가 우연히 남편 핸드폰을 봤어요. 카톡을요. 둘이서 무척 친한 느낌이었고, 온갖 얘기를 다 했더라구요. 정말 온갖 일상 얘기요. 그 여자 소개팅 이야기도 있었고, 어디 케이크가 맛있다더라, 회사 끝나고 가보자. 그런 얘기도 있었어요.”


“소개팅? 결혼한 여자가 아니야?”


나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인지 상대 여자도 당연히 유부녀라 생각했다. 근데 회사 끝나고 둘이 케이크를 먹으러 가자는 건 거의 사귀는 거 아닌가?


“싱글이야. 둘이서 카페 갔던 얘기도 있더라구. 둘이서 왜 카페를 가요? 할 말이 있으면 회사에서 하면 되잖아. 둘이서 카페를 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상한 거 아니에요?”


희수는 남편을 쳐다보면서 동의를 구했다. 남편은 몇 초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둘이서 카페를 갈 수도 있죠. 남자랑 여자라서요? 사무실에서 눈치 보여서 말 못 할 상황이 있거나, 뭔가를 한참 상의해야 할 업무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희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는 표시로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시늉을 하고 입맛을 한번 다시더니 몸을 앞으로 조금 더 기울이고 입을 열었다.


“자, 형부. 언니랑 어떤 남자가 카페에 둘이 있는 걸 우연히 봤다고 생각해보세요. 기분 나빠요, 안 나빠요? 언니도 생각해봐. 형부랑 어떤 여자랑 둘이 카페에 앉아서 얘기하는 거야.”


“기분 나쁜 건 이해를 해요. 나도 기분 나쁠 거 같아요. 근데 그런 일 한번 없이 회사생활 하는 거 쉽지 않아요. 단지 그거예요? 둘이 되게 친하고, 카톡으로 일상 얘기하고 둘이 카페도 간 거?”


나는 제발 그것뿐이어라, 속으로 염불을 외우면서 남편의 말을 거들었다.


“희수야. 나라도 되게 기분 나빠. 근데 직장 다니다 보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


나도 기분이 상할 것은 확실하다. 보면 안 되는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괜히 심장이 두근두근할 것도 같고. 하지만 희수한테 영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잖은가.


“회사가 학교는 아니잖아. 나는 회사 안 다녀봤어? 결혼까지 한 사람이 직장에서 미혼인 여자랑 그렇게 친해진다는 것 자체가 난 이해가 안 가는 거야. 오빠가 나랑 사귈 때 뭐라고 했게. 남자들이 딴생각한다고 되도록 멀리하라고 했어. 남자 직원들이랑 회사 안에서 말 섞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야. 근데 휴가 중에도 둘이 카톡을 했더라니까. 임신한 나랑 여행하는 중에도 말이야.”


뭐라고? 속으로는 욕이 나왔다.


“와, 그건 기분 나쁘겠다. 와이프랑 여행 중에 왜 카톡을 해?”


남편이 내 허벅지를 살짝 찔렀다. 도움 안 될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건가. 하지만 여기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건 오히려 희수를 기만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나도 남편이 회사 다닐 때 알게 모르게 그런 쪽으로 조금씩 상처를 받았었다. 희수의 말을 듣자 나 역시도 그때 일들이 다시 고스란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상처와 짜증이 아직도 옅어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니 희수는 오죽해? 나는 희수의 심정을 백 번 천 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톡 내용을 보면서 수상하다 싶은 점이 있었어요? 둘이 약간 달콤한 뉘앙스로 말을 하거나, 어떤 신체접촉을 했다는 내용 같은 거?”


남편은 희수가 복수를 들먹일 합당한 근거가 있는지를 물었다.


“제가 본 부분에서는 신체접촉을 암시하는 건 없었어요. 근데 나랑 단둘이 여행할 때도 말을 걸었다는 건 계속 그 사람 생각을 했다는 거 아니에요? 난 정말 이해가 안 가고 너무너무 상처를 받았어요. 둘이 둘도 없는 친구야 뭐야? 그 대화를 못 봐서 그래요. 진짜 둘이 엄청 친했다니까요.”


희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몇 년 전의 상처가 또다시 벌겋게 벌어진 모양이었다.


“직장에서도 친구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게 어쩌다 여자가 될 수도 있겠죠. 드물지만 그런 경우도 있을 거예요. 남자 동료 중에 영 마음 맞는 사람이 없으면 여자랑 친구가 될 수도 있겠죠. 회사에서 혼자만 지낼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성별을 떠나서 정말 친한 동료면 휴가지에서도 카톡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뭐라고?”

“뭐라구요?”

남편의 말에 나와 희수는 동시에 발끈했다.


“그러니까 남편이랑 그 오피스 와이프? 그 개념이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는데….”


남편이 나와 희수의 반응에 놀라 다시 말하려 했다.


“아, 그것도 몰라?”


이미 열이 받은 나는 남편의 말을 잘랐다.


“직장에서 서로 와이프네, 허즈번드네 하고 꼴값들을 떠는 거잖아. 서로 그렇게 짝지어서 부부처럼 의지하는 거래. 진짜 와이프랑 허즈번드는 그렇게들 싫어하면서 직장에서는 또 그렇게 와이프랑 허즈번드를 두고 싶다는 거지. 진짜 꼴불견들이야.”


“왜 화를 내고 그래. 목소리 좀 낮춰.”


남편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나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나도 예전에 받았던 자잘한 작은 상처들이 다시 살아났겠다, 목소리가 좀 컸기로서니 그걸 진정시키려는 남편이 꼴 보기 싫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다.


“왜 결혼도 안 한 여자들이랑 유부남들이 서로 친근하게 구는 거야? 뭘 원하는 거야? 나도 속 터지는 일이 있었다니까? 우리가 일찍 결혼했잖아. 스물일곱 살인데 유부남이라고 하니까 회사 여자들이 다 기절초풍하더래. 나는 그것부터가 기분이 나빴어. 유부남이라서 실망스럽다는 거야 뭐야? 그러더니 유부남인 걸 아랑곳하지도 않고 이 사람을 오빠 오빠하고 따르면서 좋아하더라니까? 직장에서 웬 오빠? 주말에도 자기들 모여서 논다고 유부남한테 나오라는 전화를 다 했어. 미친 거 아니니?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나는 열이 끓어올라서 또다시 남편을 째려봤다. 남편은 진정하라는 듯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고 희수에게 말했다.


“직장에서 친해야 서로 편한 게 있잖아요. 일부러 티 나게 거리를 두면 같이 일할 때 힘들어지니까. 희수 씨도 같은 직장에 있어서 알잖아요. 업무 관련 직원들끼리는 성별 따지지 않고 일부러 친해지려 작정하기도 하는 거죠.”


남편의 말은 나는 물론이고 희수에게도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친밀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건 남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때 난 너무너무 상처받았고 그게 절대 아물지가 않는 거예요. 은성이도 이제 많이 키웠으니까 나도 다시 일해서 오피스 허즈번드 만들 거예요.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매일 카톡도 하고 카페도 가고 밥도 먹고 같이 볼링도 치고 놀 거야. 내가 그렇게 해도 남편은 자기가 한 짓이 있으니까 나한테 아무 말도 못 할 거 아니에요? 난 조만간 어떻게든 다시 일할 생각이고 그때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 작정이에요.”


이게 희수가 말하는 복수인가? 


“그러니까 그게 은성이 임신했을 때란 거잖아요? 그럼 그때 일로 지금까지 화가 나 있다는 거예요?”


“형부, 그게 다가 아니에요. 남편은 제 자존감을 너무 떨어뜨려요. 때려야만 폭력이에요? 언어폭력도 심한 폭력이잖아요. 소리 지르면 얼마나 무섭다구요.”


“언어폭력? 일단 너를 때리지는 않았고.”


내가 끼어들었다. 나 역시 예전의 일로 여전히 열 받은 상태였지만 희수 얘기가 더 급하니까.


“내가 털어놓으니까 의사 선생님도 남편의 폭력 지수가 높다고 했어. 제일 심한 거, 그러니까 직접 때리는 거 빼고 다 했다니까?”


“그럼 물건도 집어 던지고?”


“매번 너무 꼬투리를 잡고, 화를 내. 작은 일에도 화를 내요, 형부. 너는 잘하는 게 뭐가 있냐고 해요. 나는 애도 잘 못 키우고, 살림도 못한대요. 퇴근하면서부터 집이 엉망이라고 화내고, 설거짓거리 남아있어도 화내고, 일일이 다 말도 못 해요. 온갖 꼬투리를 잡아서 화를 내고 말로 날 잡아 내려서 자존감이 바닥 치게 만들어요. 오빠가 덩치도 되게 크잖아요. 알죠? 딱 한 번이었지만 물건을 던진 적도 있었다니까요. 그때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살다 살다 그렇게 무서운 건 처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 언제 오나 조마조마하고, 도어록 누르는 소리만 나도 막 심장이 뛰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과 간 거야? 두렵고 무서워서?”


“잠도 잘 못 자고 그러니까 약 먹으면 좀 나아질까 하고 갔지. 한결 나아지긴 했어.”


“희수야, 그 여자 아직도 회사에 있어?”


“아니, 그때 그러구 금방 다른 데로 이직했어.”


“그래? 그럼 그 이후에도 계속 톡 하거나 만나는 거 같아? 되게 친했다며.”


“모르지 뭐. 한번 걸렸으니 만나도 조심하지 않겠어? 대화창도 바로 지우겠지.”


“그렇게 감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상처 계속 간다. 나 지금 옛날 일로 확 열 받는 거 봤지? 그럼 그 이후에 네가 눈치챈 건 없는 거잖아. 그 여자도 다른 데 갔고. 그거 봤을 때 남편한테 난리 쳤어? 따졌어? 아니면 말도 못 하고 여태 너만 상처받은 채로 계속 있는 거야?”


“당연히 난리 쳤지. 가뜩이나 임신해서 기분도 오르락내리락하잖아. 임신했을 때 서운하게 하면 평생 간다는데, 이건 뭐 말해 뭐해. 내가 정말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엄청 난리를 쳤어. 나 원래 그런 법이 없잖아. 알지?”


“그랬더니 뭐래?”


“절대 그런 사이 아니라면서 스크롤해서 옛날 대화부터 막 넘기는 거야. 내용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그만큼이나 얘기했다는 사실에 짜증만 더 증폭됐지. 어쨌든 오빠가 나중에는 기분 나빴겠다고, 미안하다고는 했어.”


“뭐? 남편이 미안하다고 했다고? 그리고 그 여자는 이직했고? 근데도 너 지금 몇 년째 이러는 거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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