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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Aug 20. 2020

#16 “정말 모든 게 새로운 시각이야.”

사실은 사랑하는 사이 #16

연재 중이던 소설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2021.1.15)

<하는, 사랑> 출간을 알립니다. 

하는, 사랑




:: 연재소설입니다. 순서를 확인해주세요. ::

:: 19세 미만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있습니다. ::



#16

 

집으로 오는 내내 남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남자를 몰라? 저토록 나 몰라라 했다는 게 말이 돼?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자기 남편은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람이래.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 둔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 이유가 자기는 스킨십을 싫어해서라고? 그게 말이 돼? 그럼 남편이 오해하지 않도록 말을 해줬어야지. 희수 씨는 앞으로 남편한테 진짜 잘 해줘야 해. 그동안의 세월을 다 보상해줘도 남편 마음이 풀릴까 말까야. 정작 화를 풀어야 하는 사람은 희수 씨 남편이었어. 그리고 지난번에 한 번 했다고 무슨 권력을 누리겠다는 거야. 그 한 번으로 뭐가 바뀌길 기대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


남편은 상기된 얼굴로 운전대를 꽉 잡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근데 희수 남편도 그래. 왜 지레 포기한 건데? 남자가 시도했어야지. 아픈 사람이 자기가 나서서 해보자고 말하는 게 쉬워? 희수가 아파하니까 안쓰러워서 요구하기 어려운 심정은 이해해. 근데 희수가 아파서 쓰러진 것도 아닐 거 아냐. 희수는 해볼 생각이 있었다잖아. 남편이 좀 노력했어야지. 계속 핸드잡만 요구하면 누가 달갑겠어?”


남편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희수는 그래도 남편 사랑하는 거야. 사랑이 전혀 없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 희수는 가능성 있어.”


나는 여전히 희수에게 사랑은 있다고 생각했다. 화난 건 화난 거고, 사랑은 사랑이니까. 집에 돌아와 씻고 나오니 희수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언니 오늘 고마워! 나 진짜 사랑이 아니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말에는 절대 설득이 안 될 것 같았는데 언니랑 형부 말을 들어보니 다 일리가 있어. 집에 오면서 결심했어. 내가 당장 다정하게 대하긴 불가능하겠지만 먼저 다가가는 노력은 해볼게. 나도 언니처럼 매일 블로우잡을 해볼까? 1일 1블로우잡! 아, 이거 쓰고 보니까 너무 웃기네?”


언제나 유머가 있는 희수는 진지한 말끝에도 유머를 담았다.


“그래. 네가 조금만 달라져도 알아채고 네 남편도 바뀔 거야. 무뚝뚝한 사람 아니라며. 원래는 세상 부러울 거 없이 다정했던 사람이었다고 아까 네가 그랬잖아. 근데 그렇게 다정했던 사람이 화내는 사람이 됐을 때는 그 사람도 타격이 있어. 남편이 금방 안 바뀐다고 돌아서지 마. 상처받은 게 너만은 아니라는 걸 생각하고 마음을 달래 줘.”


“난 잘못한 사람은 무조건 오빠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도 처음부터 다 잘못한 거 같아. 지금 그걸 따지는 것도 의미 없겠지만 말이야. 오늘 정말 많은 걸 깨달았어.”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희수의 생각을 바꾼 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지금 따지는 게 의미 없는 건 그 여자 사건이야. 그 일은 두 번 다시 생각하지 마. 그리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도 처음엔 어렵겠지만 또 하다 보면 금방 적응될 거야. 작은 것부터 시작해봐. 간식 같은 걸 좀 챙겨주든가. 의외로 남자들이 먹을 것에 약하다?”


“알겠어. 기회 봐서 아침 먹을 건지 물어봐야겠다. 근데 폭언할 때는 진짜 장난 아니야. 그거 다 얘기하면 언니 놀라 자빠질걸. 어쨌든 지금은 노력해야겠지. 나의 오르가슴을 위해서.”


이 순간에도 오르가슴을 빼놓는 법이 없는 희수에게 웃음이 났다. 


“그래, 너의 오르가슴도 찾고 행복도 찾아. 그게 다 일맥상통하는 거니까. 그리고 이게 은성이의 행복과도 직결되는 일이잖아.”


“맞아. 은성이 행복도 걸려 있지.”


“나도 섹스하고 씻을 때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난 적도 있었어. 근데 아프다고 말하면 오빠가 맘 상할 거 같더라고. 그리고 처음에는 다 아프다니까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했어. 나도 몇 년을 그랬어. 둘이 대화를 많이 해야 했는데 그게 너무 안타까워.”


“나 정말, 오늘 모든 게 새로운 시각이야.”


“제일 좋은 건, 너의 이 모든 감정을 남편한테 다 말을 하는 거야. 속상했던 거 아팠던 거 모두 다, 울면서라도 전부 내뱉어 버리는 거야. 너무 아파서 거부했는데 이렇게 된 거, 사실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아서 싫어했었다는 거. 그 여자 얘기도 마지막으로 꺼내도 되겠지. 앞으로 노력할 거니까 오빠도 함께 노력해달라고 말해. 네 남편 태도 보면 정말 늦지 않았어.”


“언니, 나 이런 얘기는 진짜 처음 들어. 내가 이런 얘기 꺼내면 모두 다 남편을 돈 벌어오는 기계로만 생각하랬어. 어떤 기대도 하지 말고. 정말 인터넷에서도 다 그런 얘기뿐이었어. 사랑 따위는 아무도 입도 뻥긋 안 해. 심지어 유명 강사들이나 육아 책에서도 그래. 의사 선생님도 섹스 안 한다니까 아무 얘기도 안 했어. 그 누구도 섹스해야 한다는 언급 자체도 안 했어. 이런 얘기는 진짜 처음이야. 나 그럼 일단 1일 1블로우잡 시도해볼래. 거부하면 할 수 없고.”


“너무 길다. 1일 1잡이라고 말하자 우리.”


“하하, 그래. 1일 1잡. 아까 형부가 언니는 매일 해준다고 그래서 나 정말 너무 놀라고 감동까지 받았어. 게다가 언니는 한 번도 거부한 적 없다고 한 것도 그렇고.”


“에이, 나도 거부한 적 있지 왜 없어. 근데 그게 옛날이라서 오빠가 얘기 안 한 거야. 그리고 블로우잡은 섹스를 자주 하니까 그것도 자주 하는 거고.”


“언니. 정말 고마워. 내가 다음에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남편이나 맛있는 거 챙겨줘.”


우리는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컴퓨터를 끄면서 오늘 대화는 꽤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수가 자신에게도 상당한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게 제일 큰 성과였다. 남편에게 응어리진 마음을 푸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나저나 오피스 와이프, 오피스 허즈번드라니, 세상이 이렇게 천박해도 되는 걸까.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뭔지 알아요? 부인이 친정 간다는 말이래요. 하하하.”


저녁에 티브이를 보는데 또 이 얘기가 나왔다. 이 문장은 너무 공공연해서 이제는 완전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지 않은 남편은 이 세상에는 없고, 간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딘가 덜떨어진 팔푼이로 취급받아 우스갯감으로 전락할 것이다.


‘남편은 부인의 부재를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이것은 세상의 정론이다. 요즘 남발되는 표현을 빌려 말하면 이 생각은 남편의 디폴트 값일 것이고,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증명 없이 받아들이기로 한 공리라고 해도 될 정도다.


이 문장의 숨은 뜻을 더 살펴보자면 부인이 갈 데라곤 친정밖에 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친정이 아닌 곳으로의 외출은 남편이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 있음이 포함된 말일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 꽤 시대착오적 생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 유유자적 하루 이틀이라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아내는 여전히 흔치 않다. 게다가 아이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아이까지 데리고 맘 편히 며칠이라도 머물 수 있는 곳이라고는 친정, 그곳이 유일할 것이다.


낮이고 밤이고 홀로 아이를 돌보는 것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아내들은 가끔 요양 가듯 친정으로 향한다. 물론 남편도 아내의 고단함을 알고 안타까운 마음도 가지고 있겠지만, 아내의 부재로 인해 신나는 속마음 또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방송에 너무 자주 나온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결혼 후에 각자 본가에 가서 자고 올 수 있다. 하지만 아이와 부인이 없는 시간을 남편들이 오매불망 기다린다는 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방송에서 지껄이는 건 정말 별로다. 저 생각이 유부남의 공통된 의견인 양 너무 자주 나와서, 마치 부추기는 느낌마저 든다.

 

언제였더라, 한번은 방송에서 한 코미디언이 갓 결혼한 매니저에게 결혼하니까 좋으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남자 매니저는 약간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네,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질문했던 코미디언이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면서 “3년만 살아봐라, 3년만.”이라고 말했다. 뭘 모른다는 투였다. 


결혼생활은 3년만 지나도 좋을 것은 거의 없다는 함의를 읽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방송이라 그런지 이 말을 들은 매니저를 포함한 좌중은 웃음꽃이 만발했다.


또 다른 방송프로에서는, 곧 결혼을 앞둔 동료 연예인에게 결혼 10년 차 연예인이 조언이랍시고 해주는 말이 가관이었다. 


“내가 살아보니까 안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어. 대화 자체를 하지 마.”라고 했다. 유부남 생활 십계명이라는 자막까지 달렸는데 “집에 있을 때는 적당히 아픈 척을 하라”로 시작했다. ‘말이 빌미가 되어 싸우니, 대화하지 말라는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자막이 또 달렸다. 


이 말을 들은 예비신랑은, 그럼 집에서는 대화하지 말고 스킨십만 하면 되냐고 다시 물었고, 이 질문을 들은 남자들 모두가 고무공처럼 튀어 오르며 놀라는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그 대답이 더 걸작이다. “쓸데없이 그런 거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화내듯이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모든 출연자는 다 같이 박장대소를 했다.


“오빠, 어떻게 저런 걸 재미있다고 내보내고 버젓이 저런 자막까지 달아서 방송하지?”


“부부는 대화도 하지 말고, 스킨십도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저렇게 방송에 나와서 하는 거야?”


남편 역시 분노했다. 그 현실적인 조언 때문이었는지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예비신랑이었던 그 연예인은 결혼 3년 만에 떠들썩한 파경을 맞이했다.


또 삼식이에 대한 이야기도 잊을 만하면 나온다. 삼식이는 집에서 세끼를 먹는, 그러니까 부인이 세끼를 꼬박 차려줘야 하는 남편을 비하하는 꽤 오래된 유행어였다. 유명한 여성 방송인이 나와서 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남편은 뭐니 뭐니 해도 삼식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렇게 얘기한다. “아유, 삼식이보다 무서운 게 있어요. 바로 ‘종간나 세끼’ 예요. 여러분, 종간나 세끼가 뭔지 아세요?”한다. “아니, 그건 또 뭐죠?”하고 진행자가 물어보니 삼시 세끼도 모자라 종종 간식까지 요구하는 남편을 지칭하는 말이라나? 스튜디오가 웃음바다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남편과 부인의 대립은 기본이요, 부부는 적대적인 관계가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웃고 떠드는 장면이 쏟아진다. 어떤 부부가 이런 요즘 세태를 무시하고 서로 사랑하고 위하면서 산다고 섣불리 말했다가는 돌팔매가 날아올 지경이다.


“우리는 친구처럼 살아요.” TV에 나와서 이렇게 말한 연예인 부부도 있었다. 그러면서 남편을 쳐다보고 눈을 흘기더니 오묘한 뉘앙스로 “정말 친구요.”라고 했다. 그녀의 몸짓과 눈빛으로 미루어 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어린이가 아니라면 다 알아차렸을 것이다.


“오빠, 왜 저런 식으로 말을 할까? 공개적으로 남편을 타박하고 있잖아.”


“글쎄, 도저히 의도를 모르겠네. 남편한테 섹스 좀 하자는 건가? 그런데 저렇게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건 이상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섹스리스라고 공표하고 싶은 거 아닐까. 아, 조만간 이혼할 생각으로 먼저 선수 치는 건가?”


“저 남편은 부인이 저렇게 말하면 기분이 상하겠지? 아직 둘 다 젊은 데다 부인은 저렇게 예쁜데. 근데 자기네는 섹스를 안 한다는 뉘앙스를 공공연히 말하면서 원망의 눈빛으로 남편을 쳐다보면 남편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들잖아. 정말 곧 이혼할 생각이라서 저렇게 공개적으로 포석을 깔아 두는 걸까?”


“그냥 별다른 뜻 없이 재미있으라고 그랬을 수도 있어. 요즘 저런 식으로 말하면 다들 좋아하고 웃고 그러니까.”


그런가. 그저 요즘의 유머 코드일 뿐인가. 여기저기 섹스 코드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역설적으로 여기도 섹스리스 저기도 섹스리스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서로들 위안 삼아 웃음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보면 되는 건가. 


저런 말이 방송에 나오면 다들 ‘나만 이러고 사는 게 아니구나. 저렇게 유명한 사람들도, 돈 많고 예쁜 사람도 마찬가지구나.’ 안심하라고? 유명인의 불행에 위로받는 심리? 어쩌면 동지의식. 그래서 그런 장면이 반응도 좋고 댓글도 많이 달려서 저렇게 계속 재생산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나만 이렇게 따지고 속 좁게 구는 걸지도 모르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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