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사랑하는 사이 #01
연재 중이던 소설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2021.1.15)
:: 연재소설입니다. 순서를 확인해주세요. ::
:: 19세 미만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있습니다. ::
#01
희수는 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탄할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희수를 알고 지낸 17년 동안, 나는 희수를 볼 때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매번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교복을 벗으면서부터 한결같이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이고, 신발도 계절에 따라 컨버스 운동화 아니면 크록스 샌들이다. 20년째 고수하고 있는 긴 생머리는 하나로 동여맬 때가 대부분이다. 희수는 이런 나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부드러운 컬이 돋보이는 단발머리는 희수를 경쾌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고등학생일 때는 오히려 차분한 긴 생머리였는데(하지만 큼직한 큐빅 장식이 달린 머리띠를 항상 하고 있었다), 대학을 가면서 쇼트커트로 싹둑 잘라버린 이후부터는 줄곧 어깨를 넘지 않는 머리 길이를 유지했다. 걸을 때마다 고무공처럼 통통 튀는 머리끝은 손상된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매끈하게 윤기가 났다.
희수는 옷도 흔치 않은 디자인을 입었다. 저런 옷은 어디에서 사는 걸까 종종 궁금증이 일었는데, 실제로 몇 번이나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서 희수가 입은 옷의 구입처를 묻는 일도 있었다. 가끔 만나는 내가 본 것만 해도 몇 번쯤 되니, 희수에게는 종종 있는 일일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하게 알려주는 희수의 모습과 반짝이는 눈으로 정보를 메모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나는 항상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희수는 우리 나이대의 사람은 별로 선택하지 않을 옷, 예를 들면 랩스커트나 짧은 주름치마, 어깨가 솟은 블라우스 같은 것도 서슴지 않고 입었는데, 무얼 어떻게 입던 상하 밸런스를 기가 막히게 맞추어서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희수는 그런 것에 감각이 탁월했다. 나는 희수를 볼 때마다 저런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겠지 했다.
나라고 예쁘고 멋진 옷들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번번이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외출하기 직전에 다시 원래 입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문밖을 나서보지도 못한 새 옷들이 옷장에 켜켜이 쌓여가는 광경은 나 혼자 보기에도 참담했고, 몇 년이 지나 그것들을 모두 버리면서 감각이 없는 사람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희수라면 아마 재활용 수거함 속의 옷더미에서도 백화점에 걸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조합을 순식간에 골라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베이지색 체크 반바지에 진주와 깃털 장식이 달린 연보라색 니트를 받쳐 입고 걸어오는 희수를 보고 언제나처럼 감탄했다.
오늘 희수를 만나기로 한 건 순전히 취재 때문이었다. 섹스 도중에 과거 연인과의 경험이 떠오르는 상황에 대해 며칠 전 남편과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쩌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스토리 구상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지인들에게 부탁해볼 요량이었고, 처음 생각난 얼굴이 희수였다.
어려서부터 만난 관계라 그런지 희수하고는 여태 섹스 얘기를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 외에는 격의 없이 대화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흔쾌히 말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 둘 다 중년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으므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희수에게 취재를 부탁했더니 어떤 이야기냐고 몹시 궁금해하며 나를 졸라댔지만, 미리 생각해두는 일이 없도록 조금의 힌트도 주지 않았다.
“여기야. 여기 쌀국수가 그렇게 맛있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만나자마자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는 언제나 갈 식당을 미리 정해 놓고 만났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나도 희수도 아이를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자마자 그 길로 달려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만나면 함께 늦은 아침을 먹었다.
희수의 딸 은성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나마 우리끼리 밥이라도 먹을 시간이 났다. 그전에는 나를 만날 때마다 은성이를 데리고 나왔다. 희수 남편이 어린이집 보내는 걸 몹시 반대한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희수는 나를 만나도 아이를 챙기느라 식사도, 대화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그래도 두어 달에 한 번씩 나를 만나는 것이 희수에게는 숨통이겠지 하는 생각에 나는 매번 희수를 굳이 카페에 앉혀두고 은성이를 데리고 30분이라도 산책하고 왔다. 희수와 예전처럼 단둘이 만날 여유가 생긴 건 은성이가 다섯 살이 되어서 병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병설 유치원이라도 보내야 학교생활 원만히 한다고 시누이가 무지 설득해줘서 보냈지, 아니면 어림없었어. 12시 40분이면 집에 오고 방학도 40일이나 된다고 하니까 오빠가 겨우 허락한 거야.”
아이의 이른 하원 시간을 맞추려면 우리는 밥을 먹고 서둘러 커피 한잔을 마실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희수는 몇 년 만에 생긴 3시간의 자유시간만으로도 살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이 한결 여유로운 내가 희수네 집 근처로 가겠다고 해도 희수는 한사코 중간지점을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희수는 가끔 커다란 케이크를 사 들고 불쑥 우리 집까지 올 때가 있었다. 반면에 나는 희수네 집을 여태 가보지 못했다. 벌써 몇 번은 초대할 법도 하건만, 희수는 자기 집에 놀러 오라는 그 마땅한 말 한 번을 하지 않았다. 내색조차 없었다.
그런 마당에 내가 먼저 너희 집에 가보자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서운하다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결혼 전에도 우리 집은 뻔질나게 드나들고 자고 가는 일도 몇 번이나 있었지만 자기 집에는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으니까. 희수에게 집은 어지간하면 공개하지 않는 공간인가 보다, 그냥 그렇게 여겼다.
우리는 간장 색깔이 나는 짭조름한 태국식 쌀국수를 먹고 바로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희수는 돌아갈 시간이 정해져 있는 신데렐라 신세였기 때문에 우리의 동선은 언제나 간단했다. 커피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희수에게 새로 구상한 소설의 줄거리를 간략히 설명하고 결혼 전에 사귀었던 남자 친구와의 섹스에 관해 말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남편과 사귀기 이전에 남자 친구가 몇 있었다는 건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희수에게는 빙빙 돌려 말할 필요는 없었다.
희수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남자 친구들과는 애석하게도 섹스 경험이 없다고 말하면서 입을 삐죽 내밀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로 서운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학 시절 꽤 오래 사귄 상대도 있었지만, 그때는 종교적 신념이 제일 강했던 때라 섹스는 생각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남편과의 첫 경험도 결혼한 이후였다고 해서 속으로는 화들짝 놀랐다.
“에이, 나한테는 너만 한 취재원이 없는데! 우리 그럼 상상을 해보자. 남편하고 심드렁하게 하는 중에 끝내줬던 과거의 섹스가 딱 떠오르는 거지. 자,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한번 그려 보자고.”
김이 새버린 나는 지어서라도 이야기를 내놓으라고 희수에게 투정을 부렸다. 나보다 다섯 살 어린 희수는 나의 장난스러운 질타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근데 언니, 나 예전에 남친이랑 해봤대도 지금 오빠랑 안 하니까 해줄 말이 없었겠는데?”
희수는 이 말을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웃어 보였다. ‘이따가 우리 떡볶이 먹을래?’라는 말을 입혀도 아무렇지 않을 만한 말투와 웃음이었다.
나는 느닷없는 희수의 고백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물었다.
“뭐? 아예 안 한다는 거야, 자주 못 한다는 거야?”
“음…. ‘아예’라고 할 수 있지. 은성이 낳고 나서 몇 번 했더라?”
희수는 횟수를 가늠해보는 듯이 눈을 이쪽저쪽으로 굴렸다. 아니, 지금 횟수를 헤아려보는 건가? 그게 가능할 정도라고?
“세 번 했나? 아니, 네 번인가?”
맙소사! 아이가 다섯 살이 되도록 이 부부는 섹스를 서너 번밖에 안 했다는 말인가? 근데 그건 어쩌다가 하게 된 거지? 짧은 몇 초 동안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는데 희수가 물었다.
“언니는 형부랑 해? 사이가 좋으니까 하겠지? 자주 해? 근데 언니 결혼한 지 10년도 훨씬 넘었잖아.”
그 순간 나는 사실을 말할지,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지를 고민했다. 섹스 라이프가 없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희수의 말간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희수는 이미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을 전제로 깔아 놓은 참이었다. 언제나처럼 희수에게 사실을 말하는 게 옳을까? 아니면 동생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거짓을 말해야 할까?
“우리는 뭐… 자주 하는 편이야.”
“자주? 자주가 얼만큼인데? 일주일?”
희수는 얼버무리는 나의 답변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는지 재차 물었다.
“음…. 별다른 일이 없으면 거의 매일 해.”
나는 결국 솔직하기로 했지만 어쩐지 못할 말을 한 것 같아 커피잔을 매만졌다. 어째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우와,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신혼도 아닌데? 책에서나 나올법한 부부가 바로 여기 있었네? 내 친구 중에 잘하고 산다는 애는 아무도 없거든.”
희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언니는 오르가슴도 느껴? 나는 그걸 모르니까 정말 답답하거든. 내가 요즘 19금 웹 소설에 푹 빠져있는데 하나도 모르니까 너무 짜증이 나는 거 있지.”
희수는 예고도 없는 펀치를 또 날렸다.
“당연히 느낄 때도 있고 못 느낄 때도 있지. 그게 언제나 오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나도 최근에서야 겨우 알게 된 거야. 예전에는 몰랐어.”
뒤에 덧붙인 말로 어느 정도 죄책감을 던 느낌이 들었다. 내가 처음부터 입때껏 좋기만 했던 건 아니라는 사실이 희수에게 위로가 되길 바랐다.
희수는 최근에 읽은 웹 소설들의 줄거리를 연거푸 말하면서 섹스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희수와 오랜 기간을 만나 오면서 여태 이 주제로 대화를 안 해봤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로 우리는 낄낄거리며 즐거워했다.
나는 희수의 고백을 들은 이후부터 내내 궁금했지만, 시종 유쾌한 표정으로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듯 떠들어대는 희수에게 왜 섹스 없이 살고 있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연신 시계를 보면서 돌아갈 시간을 가늠해보던 희수는 일어나기 전에 말했다.
“그런 거 나만 모르는 것 같아서 억울한 기분이 들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