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다섯 달 동안 무슨 일들이 있나.
출간 계약 다음 날인 8월 21일부터 저는 다시 수정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가장 급한 문제는 분량이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제 원고의 양이 요즘 같아서는 세 권도 낼 정도라고 했습니다. 대표님은 줄이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 아니겠냐며 두 권짜리로 내자고 하셨어요.
두 권이라니! 저는 깜짝 놀라서 그건 너무 모험이라고 한 권을 고집했습니다.
최대한 삭제한 원고를 한 달 후에 보내겠다고 말하고 돌아왔으나 사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출판사에서 요즘 장편 원고는 원고지 600~700매 정도가 보통이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찾아보니 과연 장편소설 공모전에도 원고지 500매 이상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한글 프로그램의 문서 정보를 보면 글자 수를 따져서 원고지 매수를 계산해줍니다.)
제가 나름대로 꽤 줄여서 투고한 제 원고는 원고지 매수로 1,468 매였습니다.
목차와 작가의 말까지 들어간다면 1,500매는 훌쩍 넘게 되겠죠. 그렇다면 절반, 최소한 3분의 1은 줄여야 한단 말인데, 어쩌면 대표님 말씀대로 두 권으로 내는 것이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계약하던 날 나눈 이야기 중에 제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들을 염두에 두고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량 줄이기도 벼랑 끝에 내몰려서 그런지 삭제할 곳들이 꽤 눈에 띄었습니다.
예전과 달리 거침없이 삭제했지만, 다시 창작해내야 하는 에피소드들도 생겼기에 만만치 않았어요.
게다가 작가의 말이나 목차 등으로 잡아먹을 페이지도 생기니까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열심히 쓰고 지운 한 달이었습니다.
출판사에서 분량을 가늠할 수 있도록 작가의 말도 일단 초고를 써서 붙였고, 목차도 넣어 보냈습니다.
A4지로 159쪽, 원고지 매수로 1,256매가 저의 최선이었습니다.
'괜찮아, 편집장님이 무참히 삭제해 주시겠지.'
저의 전략은 편집장님의 삭제를 기다리는 거였습니다. 메일에도 300매 밖에 줄이지 못했으니 불필요해 보이는 꼭지는 통으로 들어내고 뺄만한 게 보이면 일단 모두 표기를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9월 20일에 원고를 보내고 나니 노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쉬지 말고 다시 퇴고를 해볼까 했지만, 삭제되는 부분이 어떤 건지도 모른 채로 수정하고 싶지 않아서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교정지가 오지 않았습니다. 2주가 지나면서부터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나 싶었지만 교정지가 오면 또 눈에 불을 켤 텐데... 하면서 계속 놀았어요.
11월이 되었습니다. 11월이 되었는데도 연락이 없으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혼자서 온갖 안 좋은 상상은 다 해보다가 연락을 했습니다.
보고 있는 중인데 너무 바빠서 속도를 못 내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출간되는 책들로 미루어보아 무지 바쁠 것이라는 예상을 하긴 했습니다만...)
문제는 그다음 말이었습니다.
"그동안 수정한 부분이 있으면 보내주세요."
오 마이!!!!
교정지가 언제 오나 기다리면서 계속 놀고 있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어요.
이틀 후에 보내드리겠다고 하고 저는 폭주기관차처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원고를 이틀 안에 보려니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지만, 일단 수정 원고를 보내고 조만간 교정지가 오면 그때 천천히 보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1월 4일 오후에 가까스로 수정 원고를 다시 보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는 동안 제목을 생각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사랑하는 사이'라는 제목으로는 내용을 짐작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계약 날 들었기 때문에 다른 제목을 생각해야 했어요.
출판사에서는 조금이라도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제목이었으면 했고, 저는 생각해둔 4가지 제목을 수정 원고를 보내면서 같이 전달했습니다. (그중에 제가 1순위로 제시한 제목이 최종 낙점되었습니다.)
4일에 수정 원고를 보내고, 일주일이면 교정지가 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교정지는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내심 올해를 넘겨 새해에 출간되었으면 했기 때문에 이왕 좀 더 늦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거의 한 달이 지난 11월 27일에 덜컥 PDF 파일이 넘어왔어요.
PDF? 왜? 벌써?
놀라서 몇 시간 동안 원고와 전부 대조해보았는데, 삭제된 곳이나 고쳐진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띄어쓰기는 수정되어 있었어요.) 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삭제하는 곳이 없어요?"
"삭제하려고 하면 앞 뒤 다 연결되어서 삭제할 수가 없어요. 그냥 다 내야겠어요."
소설이라서 그런 건지 출판사에서는 단어 하나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계속 저 혼자 망망대해에서 노를 저어야 했어요.
이상한 문장에 빨간색 밑줄이나 의문이 달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의 입장에서는 이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퇴고만 하면 되니까요.
12월 17일에는 표지 시안까지 넘어왔어요.
표지에 들어가는 카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출판사에 제 의견을 내야 했습니다.
그 의견을 쓰는 데도 반나절이 꼬박 걸렸는데, 출판사에서는 감사하게도 저의 의견에 공감하시고 제 요구를 전부 수용해주셨어요.
표지 시안도 다시 여러 개가 넘어왔는데,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컬러 결정도 이틀이 넘게 걸렸어요.
책날개에 쓸 사진과 문구도 보내라고 하셔서, 급히 현관 벽 앞에서 맨 얼굴로 찍었습니다. 원래 화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화장품도 없어서 시간이 차고 넘친다 해도 사실 달라질 건 없었습니다.
그래도 막연하게 괜찮은 카페에 가서 사진을 찍어볼까 생각하긴 했는데, 마침 코로나가 극성이라서 모든 카페는 머물 수 없는 상태였어요. 어차피 작게 들어가는 사진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마무리 수순을 걷고 있었습니다.
저는 원고를 더 봐야 하는데 맘이 급했어요.
표지와 카피, 프로필 사진으로 날려버린 시간 때문에 밤을 꼴딱 새웠습니다.
12월 23일 오전에 18번째 퇴고를 하면서도 저는 수정할 것을 이만큼이나 보냈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수정한 원고는 23일 오후에 다시 PDF로 돌아왔고, 저는 크리스마스 연휴 내내 또 꼼짝없이 앉아 수정을 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두 달 동안 놀지 말고 계속 퇴고만 하고 있을 걸 그랬다는 푸념을 남편에게 몇 번이나 쏟아냈는지 몰라요.
12월 28일 월요일 아침 9시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수정사항이 적용된 PDF가 오면 새해가 되는 삼일 연휴 동안 마지막 퇴고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대표님께 연락이 왔어요.
"작가님,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연말이라 인쇄소가 바빠서 제작부장님이 벌써 인쇄소에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2020년 12월 28일 탈고와 동시에,
1년 5개월 7일이 걸린 제 장편소설 원고는 370페이지에 달하는 책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마지막 한 꼭지를 더 올리고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