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기적이다.
장편소설 초고 쓰기부터 출간까지의 과정을 순서대로 정리해보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이 마지막입니다.
저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출간까지의 순간순간이 기적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은 생각해본 적도 없던 사람인데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제 일이지만 저도 믿기지가 않거든요.
당연히 소설에 대해서 배워본 적도 없고, 혼자 파헤치며 공부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소설에는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소설에는 있는지 없는지를 따질 수도 없어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니까요.
구조야 어떻든 뒷 이야기가 궁금하고 재미가 있다면 그것이 저에게는 좋은 소설이었기에, 독자분들도 그리 여겨주셨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작가 스티븐 킹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문학적 우수성에 이끌려 소설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비행기에 가지고 탈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스티븐 킹 작가는 강조하기 위해 단적으로 말한 거지만, 저는 물론 문학적 우수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소설은 이야기이니까 최고 가치는 재미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제 소설은 재미있는 쪽일까요?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읽으시면서 재미를 느끼실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면 나름 노력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막상 끝에 다다르니 과연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내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더 해볼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제 생각은 그렇지만 지난 일 년 반의 시간을 고스란히 지켜본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가란 퇴고를 견디는 자다!"
열 번이 넘어가면서부터 남편은 그걸 어떻게 계속 보고 있냐고 종종 말했어요. 아마 출간 계약을 하지 못했다면 저도 열두 번의 퇴고를 끝으로 그만두었을 거예요.
하지만 열한 번 퇴고를 한 원고로 계약을 했고, 계약을 했으니 계속 보는 수밖에 없었고, 질세라 수정할 곳은 끝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대표님이 마무리하겠다고 자르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퇴고의 물레방아를 멈추기 힘들었을 거예요.
크리스마스에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6학년 영어 선생님의 귀중한 수업'이라는 기사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계속 고쳐라, 어떤 글도 완성된 건 없다. 마감에 이른 것일 뿐. "
(Rewrite. Rewrite. Rewrite. No piece of writing is ever done; it merely meets a deadline.)
이 기사의 글을 저도 12월 25일, 그러니까 열아홉 번째 퇴고를 하는 중에 보았습니다.
왜 계속 수정할 것이 나오는 건지 발을 동동거리면서 한심해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떤 글도 완성된 건 없다는 저 문장에 꽤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평소에 퇴고를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네댓 번이면 공개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소설을 퇴고하면서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빡빡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써놓은 글을 섣불리 공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고칠수록 괜찮아진다는 것을 지난 일 년 반 동안 너무나 명확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들도 열 번은 다시 읽고 고치고 나서 발행 버튼을 눌렀습니다.
저는 또 누군가 받게 될 상처가 없을지에 대해 점점 더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런 문장을 써도 될까? 누군가는 이 대목에서 상처 받지 않을까?
이 세상의 어떤 글도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건 알지만 제 글로 상처 받는 사람은 없었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바람을 가졌습니다.
책, 드라마, 영화.... 우리는 온 천지의 모든 것에 상처 받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저는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자꾸 검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 이렇게 써도 괜찮을까?'
남편에게도 자주 물어봤어요.
제 소설은 어떤 면에서는 남자에게, 어떤 면에서는 여자에게, 어떤 면에서는 모두에게 욕을 먹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의 이런 걱정을 들은 지인들은 그런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고, 위로를 받거나 공감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라고 말해주었지만 좀처럼 걱정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던 중에 다음 대목을 봤어요.
그녀는 볼일을 마치고 손을 씻은 다음, 건조기 아래 손을 집어넣고 화장실이 참 크기도 하다, 수술을 해도 되겠네, 라고 생각했다. 휠체어를 쓰는 사람들 때문이다. 요즘은 뭐든 휠체어가 들어갈 만큼 크게 짓지 않으면 소송을 당하는데, 올리브는 자신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다면 누가 자신을 총으로 쏴주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올리브 키터리지 中>
이걸 읽은 순간 '우와,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지? 나 같으면 절대 쓸 수 없을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휠체어 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걸 읽으면 얼마나 상처 받겠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작가)의 생각이 아니고 올리브 키터리지(등장인물)의 생각인 겁니다. 작가의 생각은 모르지만 소설 속의 올리브는 저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인물이거든요.
독자분들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게 여겨주시겠지, 그렇게 믿기로 하고 마음을 비웠습니다.
글이 또 길어지고 있지만 딱 하나만 더 써보겠습니다.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처음에 쓰기 시작할 때는 결말은커녕 대략적인 줄거리도 없었어요.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흐를지 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시작점 밖에 없었어요. 미리 이야기의 흐름을 계획하고 쓴 것이 아니고 써나가면서 줄거리를 만들고, 결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야기가 나와서 전체가 완성된다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스티븐 킹이 말한 '화석을 발굴하는 느낌'이 뭔지 아주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소설의 후반에 '희재'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제가 어떤 이야기가 필요해서 만들어 낸 인물이었는데 희재라는 인물을 만들고 이야기를 쓰다 보니까 주인공 윤주와 희재가 애초에 제가 생각한 스토리가 아닌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게요?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어느 소설가의 글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등장인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고 했던가, 자유의지가 있다고 했던가, 어쨌든 이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희재와 윤주가 원래 제가 하려던 이야기 말고 둘이 다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겠어요? 정말 굉장히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그 둘의 대화를 엿듣고 받아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원래 쓰려던 이야기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또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시대에는 탈고가 끝났다고 작가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네요.
출판사에서 북 트레일러를 만든다고 하여, 저도 나름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고 정리해서 보냈는데 그걸 채택해 주셨어요. 트레일러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됩니다.
또 책 판매가 시작되면 구매하시는 분들에게 어떤 이벤트를 할지에 대해 기획해보기도 하고요.
영화배우들이 영화 홍보를 하는 것처럼 저도 부끄러움과 소심한 마음을 잠시 모른 척하고 홍보도 해야겠지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제 아이가 읽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점이에요.
아이에게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읽는 것을 허락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도 이 소설의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 제 소설책의 제목은 <하는, 사랑> 입니다.
이전 글에서 썼지만 새 제목도 제가 지었습니다.
말하지 않는 사랑,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금방 날아가버리고 맙니다.
말하는 사랑, 행동하는 사랑, 노력하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하는, 사랑 입니다.
열 번 퇴고했을 때쯤 지었던 제목인 '사실은 사랑하는 사이'는 표지의 카피로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