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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 Aug 26. 2021

남편이 백수라도 괜찮을까

딩크 라이프, 정말로 행복한지 궁금하시다면

  "불안 지수가 상당히 높으시네요. 자존감 지수는 거의 0에 가깝고."

  나는 상담을 받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 직원들을 위해 운영하는 상담센터였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기 전에 들르는 곳. 여기서도 해결이 안 되면 회사에서 지정된 정신과로 연결해주곤 한다. 첫 상담 이후 몇 가지 검사지에 답을 했고, 그 결과를 듣는 자리였다. 불안지수가 높다는 건 예상된 결과였다. 나는 불안을 견딜 수 없어서 상담센터를 찾았으니까.


  한 동안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일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마음이 너무 지쳐있었다. 모든 게 불안했다. 하던 프로젝트가 잘 안될까 봐, 클라이언트에게 컴플레인을 받을까 봐, 그러면 또 팀장에게 불려 가 욕을 먹을까 봐, 그러다 나 역시도 후배들에게 그 화를 풀까 봐. 급기야는 전화기만 울려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출근이 빠른 클라이언트는 아침 댓바람부터 카톡을 보내곤 하는데, 출근할 때까지 그 메시지를 열어보지도 못하고 알림 창만 보며 불안에 떨곤 했다. 이 전화를 받으면, 이 메시지를 읽으면 또 무슨 일이 시작될까. 그렇게 매일 불안과 싸우며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와 수백 통의 메시지를 받아내며 일을 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안할까요? 그 상황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봐 불안한 거예요?"

  상담은 대화를 통해 불안의 원인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나의 불안의 근본은 무얼까. 나는 왜 불안을 견디면서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걸까. 나는 잃는 것이 두려웠다. 그동안 일하며 쌓은 평판, 모래알 쌓듯 조금씩 올려온 연봉, 그리고 그것으로 이뤄온 우리 가족의 삶. 가족이라 봤자 나와 아내뿐이지만, 우리는 마치 두 개의 기둥처럼 균등하게 그 삶을 받치고 서 있다. 그중 하나가 무너진다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내 안에 있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나는 작은 균열조차 불안해하며 살고 있었다. 쉽게 말해, 나에겐 실패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도전도 자존감이 높아야 잘하는데, 저 자존감 되게 높거든요. 자존감은 높을수록 좋은 것 같아요."

  그룹 '악동뮤지션'의 멤버 '수현'이 이렇게 말했단다. 내 상담 내용을 다 들은 아내가 해준 이야기다. 수현의 자존감이 높을 수 있었던 건,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이 너무나 소중한 사람인 걸 아니까, 그래서 다른 누구도 내 존재에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렇게 늘 당당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도 어릴 땐 그러지 않았나.


  하지만 커가면서 나는 자존감을 잃어갔다. 나에게 그런 사랑과 지지를 보내줄 사람이 더는 없기 때문에. 지지는커녕 나를 잡아먹으려, 혹은 이용해 먹으려 안달이 난 사람들만 주위에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도전할 용기도, 실패를 무릅쓸 용기도 사라졌다. 용기가 사라지자 나는 모든 게 불안해졌다. 내게 필요한 건 믿음이었다. 조건 없는 믿음. 내가 어떤 실패를 하고 실수를 해도 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믿음.


  "그러니까 우린 서로를 무조건 지지해주기로 하자. 그래야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아내와 나는 약속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나 서로를 지지해주기로. 부모님 품을 떠난 우리는, 세상에 단 둘 뿐인 우리는, 오로지 서로에게서 믿음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우리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너무나 많다. 쓸 데 없는 나르시시즘에 빠질 만한 나이도 지났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의 조건 없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누군가는 서로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부부로서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자신의 사고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관련하여서도 진리 말고는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이런 용기는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나무생각


  다음 날, 나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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