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아저씨의 요가 도전기
그날의 수련은 조금 시시하게 끝나려던 참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내 입에서 '시시하다'라는 단어가 나올 수 있다니. 이제 몸이 어느 정도 요가에 적응해가는 것 같았다. 특히 유연성보다 근력이 요구되는 자세는 나도 남들 못지않게 잘 해낼 수 있다. 그날은 주로 팔의 힘을 많이 사용하는 수련이었는데, 아무래도 주변의 회원님들 보다는 내 근력이 나아 보였다. 예를 들면 '차투랑가 단다사나'. 팔 굽혀 펴기를 할 때 몸이 내려간 상태로 버티는 자세와 비슷하다. 팔의 힘이 부족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어려워하는데, 나는 그래도 헬스장에서 바벨깨나 들어 올렸으니까. 오늘 수련은 별 거 없네,라고 생각하며 수련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선생님이 마지막 자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까마귀 자세, '바카아사나'를 해 볼 거예요. 손으로 땅을 짚고, 두 무릎을 겨드랑이 안쪽으로 최대한 밀착해볼게요. 그리고 몸을 숙이면서 두 발을 땅에서 떨어뜨려, 두 팔로만 중심을 잡아보는 거예요."
어라, 이거 정말 멋지잖아! 정말 한 마리의 까마귀 같네?! 선생님은 그 가느다란 팔뚝으로도 가볍게 온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팔에 근력이 있으니까, 중심만 잘 잡으면 별로 어렵지 않겠다 싶었다. 나는 이 자세에 좀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 그날은 위아래로 새까만 요가복을 입고 갔는데, 이 자세를 멋지게 해내면 정말 한 마리의 까마귀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까마귀 깃털을 걸치고 다니는 주인공 '존 스노우'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야심 차게 자세에 도전했다.
두 무릎을 겨드랑이 안 쪽에 깊숙이 끼워 넣고, 땅을 짚은 두 팔에 무게를 실은 다음 발가락으로 땅을 살짝 밀어내 하체를 아주 조금 공중으로 띄어 보았다. 오, 좀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잠깐이긴 하지만 마치 까마귀처럼 날아오른 느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회원님들은 힘이 떨어져 다들 포기하는 분위기. 그러자 더 욕심이 났다. 이제 한 번 본격적으로 날아올라 볼까나. 겨드랑이에 무릎을 단단히 고정하고, 두 발로 땅을 힘차게 밀어내며, 마치 한 마리의 우아한 까마귀처럼 공중에 붕 뜬 그 순간!
그대로 몸 전체가 앞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급히 허둥대 봤지만, 손은 이미 땅을 짚고 있고 무릎은 겨드랑이에 끼어 빠지지 않았다. '어? 어어??' 하는 사이 그대로 얼굴부터 땅을 향해 추락을 시작했다. 마치 슬로 모션처럼 바닥이 두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어쩌지.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오른 나머지 밀랍 날개가 녹아 땅으로 추락해버린 이카루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게다가 사람들은 모두 날 보고 있을 텐데. '쿵' 소리와 함께 내 코가 가장 먼저 바닥에 부딪혔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환영처럼 들려왔다. 어맛! 괜찮으세요???
"네네, 그럼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물론 나는 아프지 않은 척했다. 지난 글에도 쓴 것처럼 나는 아파도 아픈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니까. 우선은 아픈 것보다는 부끄러운 게 먼저다. 하지만 마스크 안 쪽에서는 코가 시큰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코로나 덕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 콧구멍 속에서 뭔가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에이 설마. 요가원에서 까마귀 자세를 하다가 코가 깨져서 코피를 흘리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고? 설마 그게 나라고?! 남몰래 마스크 밑으로 손가락을 넣어 코를 훔쳤다. 떨리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천천히 눈앞으로 가져왔다. 맑은 콧물. 휴, 깜짝이야.
수련 도중 선생님이 하는 말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다. '무리하지 않습니다'라는 말. 어떤 자세를 할지 말지, 그 자세를 어디까지 할지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괜찮아요. 내가 이 말이 좋았던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됩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할 수 없는 건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이었다. 난 그걸 코가 깨지고서야 깨달았다. 아직 할 수 없는 자세를 마음만 앞서서 도전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정말 '큰코다치는'구나. 심지어 나는 코도 큰 편인데, 훌쩍.
나도 한 때는 욕심, 특히나 승부욕이 앞선 나머지 나의 한계도 모르고서 일단 몸을 던지곤 했다. 흔히 말하는 '허슬 플레이'다. 때로는 그 무모함이 승리의 영광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하지만 허슬 플레이에는 분명 대가가 따른다. 잘못하다가는 승리는커녕 어딘가 크게 다치게 될 수도 있다는 위험. 그래서 어릴 땐 운동을 하다 많이 다치기도 했다. 아저씨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허슬 플레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 그래서 다치거나 지치지 않고, 꾸준히, 오래도록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비단 운동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한수희 작가의 에세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를 읽다 '숨의 길이'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제주의 해녀들이 물질을 나갈 때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것은 자기 숨의 길이다. 숨을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알아야,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아야 거친 바다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정확히 알아야 살아 돌아올 수 있다. 거칠고 힘겨운 요즘 세상에선 더 그렇다. 물론 요가를 하면서 살아 돌아올 것을 걱정하기야 하겠냐만은. 적어도 코가 깨지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 그날 이후 까마귀 자세를 만날 때면 스스로에게 외친다. 제발, 절대, 무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