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이 Oct 18. 2021

'방해금지 모드'를 살고 있습니다

평범한 아저씨의 요가 도전기

  요가를 시작하고, 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요가 에세이 몇 권을 읽었다. 브런치에서도 요가에 대히 쓴 글들을 틈틈이 찾아 읽고 있다. 그런데 읽다 보면 매번 소름 끼치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번엔 아니겠지, 하면서도 몇 개의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설마 또? 설마 이 사람도? 또 퇴사했다고?! 왜 그리도 요가원엔 퇴사자들이 많은 걸까. 요가를 하다 퇴사하는 건지, 퇴사를 하고 요가를 하는 건지 전후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퇴사와 요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건 분명한가 보다. 이쯤에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회사를 그만둬버렸다. 요가를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가 에세이의 주인공들처럼 '본격적으로 요가를 하기 위해'서나 '요가로 삶을 바꾸기 위해' 퇴사한 건 절대 아니다. 고작 몇 개월 요가를 하고선 요가 강사 과정에 도전하려는 것도 아니고, 수련을 위해 인도나 발리로 떠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연히도 요가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퇴사의 결심이 섰고, 회사를 그만뒀을 뿐. 그럼 정말로 나의 퇴사와 요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걸까? 요가 에세이 '단정한 실패'를 쓴 에디터 정우성 님은 책에서 '요가와 퇴사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매트 위에서 무수히 알아차린 것들. 어떤 날 수련을 마치고 나도 모르게 흘렸던 눈물. 존경해 마지않는 우리 선생님들이야말로 나만의 배후 세력이었다. 그 모든 것을 바탕으로 나는 거부할 수 있었다. 끊어 내는 것도 가능했다.

나의 퇴사의 배후세력도 요가였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요가를 시작할 즈음, 나는 회사 안에 있는 상담센터에 다니고 있었다.


  "불안 지수가 상당히 높으세요. 자존감 지수는 거의 0에 가깝고."

  내 심리검사 결과를 손에 들고 살펴보던 상담 선생님이 말했다. 그 당시의 나는 모든 게 불안했다. 하던 프로젝트가 잘 안될까 봐, 클라이언트에게 컴플레인을 받을까 봐, 그러면 또 팀장에게 불려 가 욕을 먹을까 봐, 그러다 나 역시도 후배들에게 그 화를 풀까 봐. 급기야는 핸드폰만 울려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전화를 받으면, 이 메시지를 읽으면 또 무슨 일이 시작될까. 나의 불안은 비단 사무실에만 매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출근 시간이 빠른 클라이언트는 내 출근 시간은 아랑곳 않고 꼭두새벽부터 전화를 해댔고, 퇴근 후 늦은 밤에도 우리 팀 단톡방에서는 일과 관련된 메시지가 끊임없이 쌓였다. 그렇게 매 순간 불안과 싸우며,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와 수백 통의 메시지를 받아내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다.


  "한 번 내 마음대로 해보세요. 전화를 받기 싫으면 받지 말아 보고,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말해보세요. 아주 작은 것부터 해보는 게 필요해요."

  상담 선생님은 지금 나에겐 '나를 돌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부터, 오로지 나를 위한 행동을 해보라고 했다. 받기 싫은 연락을 피하는 것, 하기 싫다고, 못 하겠다고 말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겐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마음대로 행동하는 게 나에겐 더 큰 불안이었다. 내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회사원에게 어느 회사가 월급을 주고 싶을까, 어느 누가 일을 시키고 싶을까. 그러다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별종'으로 취급받고, 결국은 낙오자 신세가 되는 게 아닐까. 나에겐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결국 난 아무것도 실천하지 못했고, 다섯 번의 상담은 별 의미 없이 끝나버렸다.


  그즈음 요가원에 간 어느 날이었다. 수련을 하던 중 손목에 찬 애플워치의 진동이 느껴졌다. 한 번 울리고,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울린다. 이건 전화가 왔다는 신호다. 나는 곁눈질로 워치의 액정을 슬쩍 훔쳐보았다. 모르는 번호.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긴급한 상황일지 예상이라도 해볼 텐데. 모르는 번호라면... 대체 누굴까? 무슨 일일까? 혹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무슨 사고가 터졌나? 그래서 협력사에서 급히 전화를 한 걸까? 나는 또 불안해졌다. 이대로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해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매트 곁에 둔 핸드폰을 챙겨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웬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 건물 앞에 주차하셨죠? 어디 오신 차량인가요?


  에잇, 깜짝 놀랐잖아.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매트 위에 앉아 수련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날 수련을 마치고 나오는데, 선생님이 나를 불러 멈춰 세웠다.

  "저기 ㅇㅇ님, 다음부터는 수련 공간에 핸드폰은 가지고 들어오지 말아 주세요."

  예상치 못한 부탁, 혹은 질타일까. 아무튼 예상치 못한 선생님의 말에 나는 당황과 함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하긴 그렇지, 모든 사람이 전화를 받으러 왔다 갔다 하면 그 누구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을 테니. 나의 행동은 분명 다른 수련생들에게 피해를 준 게 맞다. 나는 죄송하다고, 다음부턴 사물함에 넣어 놓고 들어가겠다고 선생님께 말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불안감이 신물처럼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이 바쁜 시즌에, 매주 몇 번씩, 한 시간이나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그 사이 회사에서 나를 급하게 찾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이런 불안함을 안고서 나는 요가를 계속할 수 있을까?


  다음 수련 날, 요가원에 들어서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핸드폰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엊그제 선생님이 그렇게 얘기까지 한 마당에, 전화가 온다고 해도 나가서 받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고작 한 시간인데. 결심을 내린 나는 '방해금지 모드'를 켠 채로 핸드폰을 사물함에 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수련이 시작되었다. 평소처럼, 선생님의 말에 따라 숨을 들이쉬고 내뱉고, 몸을 움직이기 바빴다. 평소처럼, 곧 숨이 가빠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사바사나', 송장 자세에 이르러 매트 위에 힘을 빼고 누워 눈을 감았다. 평소처럼, 나는 불안했... 아니, 불안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수련 내내 한 번도 불안하지 않았다. 손목에 두른 애플워치의 존재가 이제야 떠올랐다. 


  수련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워치가 알림 진동을 울려대는 날이면, 마지막 송장 자세에 다다라 매트 위에 누워서는 불안함이 극에 달하곤 했다. 누가 카톡을 이리도 보냈을까. 또 클라이언트일까, 아니면 팀 사람들일까. 내가 잊고 있었던 급한 일이 있었던 걸까. 수련을 마치면 난 무엇부터 해결해야 할까. 하지만 방해금지 모드를 켠 그날의 수련에서는 불안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방해받지 않는' 수련을 한 것이다. 수련의 말미, 다시 매트 위에 앉아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이어졌다. 평소처럼, 수련을 마무리하는 늘 똑같은 그 말. 그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도 매트 위에서의 귀한 시간을 허락해 준, 나 자신을 위한 첫 번째 인사를 전합니다."


  그 순간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의 모든 응어리가 풀어헤쳐지면서,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흘러나와, 다음 날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그날 이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는 류의 드라마 같은 일은 물론 없었다. 하지만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날 이후 요가를 할 때마다 어김없이 '방해금지 모드'를 켠다. 사실 나를 방해하는 건 사람들이 아니었다. 클라이언트가, 팀장님이, 회사 동료들이 늘 내가 요가할 때마다 연락한 것도 아니다. 진짜 나를 방해해온 건 내 마음속 불안함이었다. 그 불안함을 잠재우는 아주 작은 시도가 나에겐 요가를 하는 시간이 되었다. 24시간 깨어있던 불안에게 '방해하지 마'라고 외치는 시간. 그러고도 다시 깨어나 구천을 떠도는 일말의 불안마저 들숨과 날숨, 움직임과 땀으로 지워내는 시간. 나 자신을 위한 첫 번째 시간.


  점차 요가를 하는 시간을 넘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다 더 많이 가져야겠다는 결심이 차곡차곡 쌓였다.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한 후 10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으니까, 이쯤에는 그런 시간이 한 번쯤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단 몇 개월 만이라도, 조금 긴 '방해금지 모드'의 시간 말이다. 난 결국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둬버렸다. 딱히 계획은 없다. 그저 내 맘대로 살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러기 위해 내가 뭘 좋아했는지부터 찾기로 했다. 나를 처음 요가 매트 위로 이끌었던 아내는 감사하게도 나의 결정을 응원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퇴사 선물로 룰루레몬의 고급스러운 요가 매트를 사주었다.


  얼떨결에 백수가 된 요즘은 아침마다 요가로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요가를 하려고 퇴사한 것은 아니지만, 퇴사를 하고 요가를 더 많이 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도 어느 쪽이 먼저인지 인과관계는 따질 수 없지만. 이제 더 이상 울리지 않는 핸드폰 따위는 저 멀리 방구석에, 혹은 요가원 사물함에 처박아 둔다. 오로지 나 홀로 매트 위에 올라앉아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수련을 시작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를 위한 첫 번째 인사를 전하며.


이전 13화 요가원에서 코 깨진 사람이 있나요 : 까마귀 자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