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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Dec 18. 2020

면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그렇다고 면귀신까지는 아니고

나이가 들수록 면이 땡긴다는 사람도 있던데 내 경우는 어쩌다가 한 번씩 찾아 먹는 정도다. 내가 어려서 맨 처음 먹은 면은 잔치국수였다. 엄마는 삶아서 차갑게 헹군 국수에 진하게 우린 멸치육수를 붓고 간장, 고춧가루, 다진 마늘, 설탕, 참기름, 쪽파, 깨를 섞어 만든 양념장을 한 숟갈 듬뿍 끼얹어 주었다. 채 쓴 호박, 당근과 파, 김치가 건더기로 들어 있었지만 입 짧은 나는 국수만 건져 먹었다. 그러니 나에게 면이란 단지 면발만 있는 음식이었다.

엄마는 잔치국수를 참 좋아해서 입맛이 없거나 찬이 없을 때면 한결같이 면을 삶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국물 없는 새빨간 면이 상 위에 오른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간 엄마도 국물 있는 국수를 마느라 지겨웠던 차에 어디 기분전환이나 해볼까 싶어 비빔국수를 마련했던 것이다. 나 역시 허여멀건 면발만 건져먹느라 지쳤던 차에 새콤달콤한 고추장 양념이 쏙쏙 밴 그 맛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여고 때는 분식집을 돌아다니며 매콤한 쫄면 맛의 신세계를 발견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납작만두와 꼬치어묵, 순대, 떡볶이를 가득 시켜 먹는 재미로 학창 시절의 스트레스를 날렸다. 그때 양배추와 깻잎, 상추를 채 쓸어 갖은양념으로 비벼 먹는 면 맛을 알게 되었다. 다 친구들 덕분이다. 글을 쓰고 있자니 그들이 보고 싶다. 결혼하며 각자 뿔뿔이 흩어져 살기에 더 궁금하고 많이 그립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게 된 후로는 명동 바닥의 분식집 쫄면을 그렇게 먹으러 다녔다. 충무로 직장인이 되고선 남대문 시장통 좁은 골목의 냄비 비빔국수 맛에 빠져 살았다. 3차까지 달린 회식 다음 날 아침 울렁이는 내장을 씻어주는 속풀이 짬뽕으로 다시 인간이 되었던 기억. 고향집과 서울을 오가며 기차역에서 먹던 유부 우동은 여행길이라는 기분 탓에 한층 맛깔났다.

그뿐인가, 추운 날 출사를 다니며 얼어붙은 손을 녹였던 해물칼국수 집의 하얗게 김 서린 유리창을 떠올리면 꿈을 꾸듯 아늑하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짜장면은 여기가 한국인가 중국인가 헷갈리게 했고, 신접살림을 차린 산본의 지하철 역사 내 쇼핑몰 식품관에서 어린 딸과 나란히 앉아 먹던 잔치국수는 엄마를 추억하게 했다. 외식으로 즐기던 숯불고기에 곁들여 먹는 육쌈냉면은 비냉의 파라다이스를 선사했다. 가족 캠핑에서 도란도란 모닥불에 둘러앉아 끓여 먹던 라면은 아날로그 감성을 가미한 형언할 수 없는 맛이었다.

가만있어 봐라. 그렇다면 나는 면을 사랑하게 된 건가? 잔치국수, 비빔국수, 쫄면, 짬뽕, 우동, 칼국수, 짜장면, 냉면, 라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는 면발의 오묘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앞으로 쉬이 빠져나오긴 힘들어 보인다. 모 개그맨처럼 후루룩 면발로 코치기 한 번 제대로 하고 싶은 겨울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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