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길택 선생님의 단편 동화에 김동성 작가의 그림이 더해진 책의 표지를 보면 절로 드는 생각이다. 한 명의 작가가 글을 쓰고 그림까지 그린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누군가의 글만 보고 그림을 그린 작품들은 새삼 그 상상력과 표현력에 감탄하게 된다. 윤석중 선생님이 쓴 동시 <넉 점 반>을 유머러스하게 재해석한 이영경 작가, 이태준 소설가의 글에 김동성 작가의 또 다른 매력이 보태진 <엄마 마중>, 박완서 작가와 권정생 선생님의 글이 가진 선한 감수성, 백석 시인의 서정적인 시구를 고스란히 그림으로 옮겨 놓은 김세현 화가의 책 <7년 동안의 잠>, <엄마 까투리>, <준치 가시> 등이 그렇다.
김동성 작가는 동양화 전공이어서 일까. 그림이 남다르게 자연친화적이며 예스럽다. 임길택 선생님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 꾸밈없이 쓰인 글의 여운이 그림으로 확산되고, 그림을 통해 글의 의미가 끊임없이 선순환한다. 1980~90년대 산골마을과 작은 학교의 모습, 김 선생님의 첫 발령지인 초등학교에서 만난 순수한 아이들과의 유대감, 좋은 선생님이 되고자 노력하는 소박하고 진실된 모습, 등굣길마다 꽃을 꺾어다가 선생님에게 선물하는 보선이의 맑고 순박한 마음씨와 그런 보선이를 대하는 김 선생님의 따뜻하고 애정 어린 심성이 책 안에 가득하다.
보선이가 하굣길에 손전등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선생님은 따릿골이라는 산마을에 산다는 보선이의 집을 방문하기로 한다. 자전거를 타고 그곳을 찾아 나서는 김 선생님의 여정에 이 책이 주는 아늑한 정취가 깃들어 있다. 졸졸 흐르는 냇물,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옥수수밭, 처마 밑 그늘에 누워있는 개들, 쨍쨍 대는 매미 소리를 지나 좁은 오솔길이 나타나자 선생님은 자전거를 두고 걷기 시작한다. 개울 양쪽에 선 빽빽한 나무들, 짙은 향기와 흰빛이 은은한 함박꽃나무, 벼랑 끝에 피어있는 도라지꽃, 온갖 들꽃들이 길동무가 되어준다. 자연 속에서 홀로 걸으며 꽃과 나무와 대화하고 향기를 맡고 선생님을 위해 꽃을 꺾었을 보선이를 생각하자 마음이 애틋해진다.
그러나 선생님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지를. 가도 가도 보선이의 집은 나타나지 않고 해는 점점 기울기 시작하는데 설상가상 길까지 잃고 헤매게 된다. 그토록 아름답던 숲 속 공간은 빛이 사라지자 공포감을 자아냈고 그제서야 보선이가 들고 다닐 수밖에 없었을 작은 손전등과 혼자 타박타박 걸었을 길을 떠올리게 된 김 선생님. 모든 상황과 마음이 헤아려지는 순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보선이가 그려졌고 언제 그랬냐는 듯 두려움의 어두운 그림자도 사라진다. 이해에 따라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순간들은 나를 향한 상대의 마음과 거기에 투영된 내 마음이 빚어내는 양갈래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와 김 선생님은 같은 길 위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훤한 대낮에 출발했건만 밤 열 시가 넘어서야 보선이네 마을 불빛을 마주한 김 선생님의 심정이 어땠을까. "보선아아!" 이름을 목청껏 부르며 내달리는 선생님의 벅찬 마음은 "내가 미안해. 너를 몰라줘서 많이 미안하구나."라는 속상함과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참 다행이야"라는 고마움, "앞으로 더 잘해줄게"라는 천진한 다짐 같은 게 마구 뒤섞인 울컥과 뭉클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흘러 졸업식날이 다가왔지만 한가득 쌓인 눈 때문에 보선이를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 김 선생님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힌다. 보선이에게 줄 선물인 '안네의 일기'를 옆 반 선생님께 맡겨두고 군 입대를 위해 떠나야 하는 김 선생님. 창밖 가득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선생님의 뒷모습만 텅 빈 교실에 남아있다. 산골짜기 그 머나먼 곳에 있을 보선이 역시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못 보고 발길을 돌려야 하기에, 어쩌면 영영 마지막일지도 모를 헤어짐이기에 그 안타까움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이별이 있으면 다른 만남이 있고 숱한 만남과 이별을 하며 우리는 성숙한다. "선생님, 보선이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 될 거예요. 아니, 지금 보선이는 행복해요." 선생님에게도 어린 보선이에게도 인생이란 긴 여행에 그저 스쳐 지나는 한순간의 만남일지 모르지만 그 시절 한없이 소중했던 마음만은 삶에 보드랍고 몽근 윤기를 더해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