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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Nov 24. 2021

처연한 마음


종종 한 단어에 몰입하여 헤어 나오지 못하는 때가 있다. 처음에는 그 단어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꾸만 되뇌면서 어감과 의미 속 바다를 이리저리 유영해본다. 이내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까지 다다르고 나면, 낯설었던 언어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 된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내가 모르는 세상의 면들을 알아갔다.


요즘은 '처연하다'라는 단어에 빠져있다. 이 말은 한때 논란을 빚었던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 <기생충> 한줄평에서 발견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여러 번 읽다 보면 '처연한'에 계속 마음에 걸렸다.


'처연하다'는 단어가 주는 분위기부터 심상치 않다. 사전적인 뜻은 '애달프고 구슬프다'인데, 본래 의미보다 좀 더 우아하고 깊은 정서가 느껴진다. 이를테면, 젊은 청년의 솔직한 울음보다는 중년의 가슴속에 맺힌 눈물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처연함은 어느 정도 깊이와 세월을 지녀야 비로소 발현될 자격이 주어진다. 만약 처연한 사람을 마주치게 된다면, 어긋난 시선과 뿌연 눈빛을 통해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겠으나 차마 자세한 사연을 묻지는 못할 것 같다.


게다가 '처연하다'는 적당히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기에 자신이 스스로 처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색하다. 예를 들면, '비에 젖은 수국의 빛깔이 처연하도록 곱다.'라든지 '노래가 어찌나 처연하던지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라는 식이다. 묘하게도 처연함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처량함이나 처참함과 다르게 처연함에는 가엾거나 불쌍하다는 마음이 없다. 어쩌면 원망스럽고 억울한 마음을 '한'이라는 정서로, 미학적으로 승화시켜왔던 한국인 특유의 혼이 이 단어에 녹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거리를 걷다 보면 자꾸만 처연한 것들을 만나게 된다. 청춘처럼 사라질 붉은 단풍들도, 공사가 무기한 연기된 낡은 빌딩도, 바에서 들려오는 80년대 여가수의 노래도, 역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반쯤 빈 소주병도 내게는 처연하게 생각된다. 이런 것들에는 더 이상 갈 데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승인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전의 나는 쉽게 지나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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