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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May 12. 2022

잡초라는 풀은 없다


1.

영영 사라진 것만 같았던 꽃들이 길가에 피었다. 전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던 것들이 요즘 들어서는 어쩜 그리 예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꽃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봄볕 아래에 연약한 얼굴을 당당히 드러낸다. 각자의 형태와 색깔을 갖고 있기에 서로 비교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결코 길지 않다. 우리는 꽃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것이 나이가 들수록 꽃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2.

요즘은 아내와 꽃 이야기를 자주 한다. 이를테면, 길가에 피어있는 쌀알처럼 희고 길쭉한 꽃나무가 이팝나무인지 조팝나무인지 실랑이를 하는 식이다. 알고 보니 그건 이팝나무였다. 이씨 성을 가진, 조선 시대 양반들이 먹는 밥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어릴 적에 쭉쭉 빨아먹던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한창 이야기했다. 길가에 피어있는 붉고 길쭉한 꽃망울을 입에 넣으면 꿀처럼 단맛이 났다. 그 꽃의 이름은 '사루비아(샐비어)'라고 한다. 꽃말은 불타는 마음, 정열, 가족애라고 했다.


3.

어느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 멀리 철도와 울타리 사이에 기다란 들풀이 나있었다. 길이는 일 미터쯤 되었는데, 벼 같은 푸른 이삭을 잔뜩 달고서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들풀을 보며 가엽고 처량한 마음이 들었다. 저 들풀은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걸까. 어떤 이유로 아무도 지나지 않는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햇빛도 겨우 닿는 곳에 피어나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까. 저것이 지금 당장 사라진다 해도 세상에 달라질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 잡초에게서 나는 언젠가 내가 경멸했던 나의 일부를 발견했다.


며칠이 지났을 때, 나는 문득 그 들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풍경과 생김새를 떠올렸다. 찾아보니 그것은 '메귀리'였다. 메귀리는 일종의 야생 귀리인데 열매가 작아서 먹기는 힘들다고 한다. 메귀리의 뿌리는 수염처럼 무척 가늘고 긴데, 아스팔트처럼 물이 부족한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내기 위함이다. 나는 이토록 볼품없는 풀에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더 나아가 그 이름을 붙인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4.

애초에 잡초는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유도 없이, 때와 장소에 맞지 않게 피어난 풀들을 잡초라고 뭉뚱그려 말하곤 한다. 하지만 모든 꽃과 풀에는 이름이 있으며, 각자 고유의 형태와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일본의 한 식물학자는 "잡초라는 풀은 없다. 그것에는 제각기 이름이 있다."라고 했다. 미국의 어느 시인은 잡초를 '그 가치가 아직 발견되지 않는 식물'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들은 언젠가 나 자신을 잡초로 여기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모든 꽃과 풀에는 제각기 이름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어떤 풀들은 그저 가치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 시절을 조금은 수월히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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