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결심한 일이 많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벌이는 일이 아니라 버리는 일이다. 나는 때 묻은 단어를 버리기로 했다. 때 묻은 단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나 부정하게 쓰이는 단어다. 비유하자면 얼굴과 손의 물기를 훔치는 수건이 닳고 닳아 걸레짝처럼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모양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걸레짝같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려다가 이제는 폐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언어는 미꾸라지처럼 끊임없이 생동한다. 새로 만들어지는 단어, 사라지는 단어, 다시 힘을 얻는 단어, 촌스러운 단어, 대충 둘러대기 좋은 단어... 등등. 언어는 그런 방식으로 변화한다. 이를테면 '작가'라는 단어가 있다. 작가는 등단하거나 정식으로 책을 출간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처럼 깨작깨작 글을 쓰고 올리는 범인(凡人)까지도 '작가'라고 불러준다. 이전부터 작가였던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로 하진 않겠지만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다.
단어 자체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만은, 사회에서 무분별하게 쓰여서 오염된 것이 여럿 있다. 그런 단어는 나의 행동을 옭아매고 생각을 구속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썩은 내가 진동해서 더 이상은 가까이 두기가 힘들다. 이제는 알아차릴만큼의 감각이 생긴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내가 버리기로 한 단어를 소개한다.
착하다
이 단어를 보면 한숨부터 나오는 사람은나뿐이 아닐 것이다. 내게 '착하다'는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착하다'는 말은 '딱히 모난 데가 없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다. 가족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말없이 순응하고, 별다른 개성이나 차별점이 없다.'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나는 어른들로부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났다. 내가 지금껏 수행해온 일련의 순응과 복종은 자발적으로 원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나를 혐오하고 바보 같다고 비난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대놓고 하지 못했는데, '착한 사람'이라는 규정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내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그러다가 결국에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내면으로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이 말을 내 삶에서 폐기하려고 한다.
당연히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 단어를 아끼기로 했다. 어떤 현상에 대한 의미나 본질을 의심하지 않고 가려버리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앞에 자격이나 신분이 붙으면 더 큰 시너지가 생긴다. 이를테면, 학생이니까, 부모니까, 남자니까, 여자니까, 형이니까, 동생이니까, 문과니까, 외국인이니까 등등.
어떤 경우에는 써도 괜찮은지 고민해봤는데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만약 적절한 용도로 쓰고 싶다면 '마땅히'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다. 그 편이 덜 거북하다. 예를 들면, '인간이라면 마땅히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누려야 한다.'라든지.
억지로
얼마 전에 쓴 <싫어하는 것 목록>에서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기도 하다. '사과'라는 글자를 보면 빨갛게 익은 사과를 상상하듯이, '억지로'라는 글자를 보면 고개를 푹 숙이고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서 간신히 끄덕이는 남자의 빨갛게 익은 얼굴이 떠오른다. 그 남자의 얼굴은 불분명하지만 나를 닮아 있었다.
남들처럼
밀레니얼 세대에게 이만큼 쓸모를 잃은 말이 있을까? 스스로 탐구하고 발견해야 하는 '삶의 의미'를 불완전하고 비합리적인 흐름에 맡겨 버리는 단어다.
완벽하게
어떤 일을 시작부터 가로막는 말이다. '완벽'과 비교하면 이 세상에 부족하지 않은 것은 없다. 바보같이 굴지 말고 일단 해보자.
후회하는
어떤 경우에도 도움이 안 되는 말이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에, 설령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내가 때 묻은 단어를 버리겠다는 건, 지금까지 내가 그것들을 지니고 살았다는 의미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홀가분한 기분마저 든다. 아직도 버려야 할 단어가 많다. 앞으로도 생각나는 대로 추가해보려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가. 폐기할 때가 된 '때 묻은 단어'를 지니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모아서 정리해보자. 언어가 그렇듯, 우리의 삶도 그런 방식으로 생동하는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