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거 없으니 아프지만 말고 건강하고......
새해(구정)가 밝았다.
아침부터 아이들이 새배 한다고 난리이다.
어제 저녁 "너희도 이제 어느정도 컸으니 아빠, 엄마에게 새배해. 물론, 새배 돈을 챙겨 줄거니까....알겠지?"
"진짜? 정말이지. 아싸~~" 신나하는 큰 아들과 막내
사실, 올해 초 6학년에 올라가는 우리 큰 아들이 핸드폰을 바꾸겠다고 돈을 모은지가 꽤 되었는데, 본인이 원하는 핸드폰(물론, 중고폰이긴 하지만)을 사기에는 조금 모자란 거 같고, 그렇게 돈을 열심히 모은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해서 새배 하라고 권유 했던 것이다.
"우와~ 5만원이다!!"
"혹시 화폐에 새겨진 사람이 누군지 알아?"
"당연히 알지. 신사임당!!"
대답은 첫째가 아닌 그보다 어린 둘째가 그것도 모를까봐 라는 듯한 표정을 보이며 답했다.
"잘 아내. 그런데, 어떤 인물인지는 아니?"
"아, 그건....."
"현모양처잖아!"
머뭇거리는 작은 아들을 대신해 자랑스럽게 말하는 큰 아들.
"응. 맞지. 현모양처......"
사실, 역사를 공부한 나는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에 맞는지 조금은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신사임당 말할때면 난 허난설헌이 떠오르곤 한다.
같은 강릉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이며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그녀들인데....어쩌면 그리 다른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허난설헌을 생각하며 '이보다 한 많은 여인이 또 있겠는가?' 라는 생각들었다.
허난설헌(1563년~1589년)
이름은 초희, 호는 난설헌, 자는 경번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벼슬은 대사간이며, 동인의 영수였던 허엽의 딸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아울러, 어릴적 부터 시문장에 뛰어났다고 알려져있으며, 그 천재성은 8살 때에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 이라는 글을 보니 가히 그 재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을 위의 은빛 창문에서 구만리 희미한
세상을 내려다 보고
바닷가 문에서 삼천년 상전 벽해를 웃으며
보고 싶다.
손으로 하늘의 해와 별을 돌리고 몸소 구천의
바람과 이슬 속을 노닐고 싶다.
허초희 [ 광한전백옥루상량문 中 ]
천재적이었던 그녀의 재능처럼 그녀의 삶도 빛났으면 좋았스렸만 그녀의 삶을 돌이켜 보면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어린 시절 당시 유교적 사회에 비추어볼 때 여성에게 관대한 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허엽)는 그녀에게 자(字)를 지어주고 글 공부도 시켰다. 아울러, 그녀의 동복 오빠였던 허봉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놀기도 하고, 그녀에게 시집이나 붓을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허균은 글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릴 적에 일찍이 시를 써서 그 누님 난설헌에게 보였다.
그 시의 내용 중 "여인이 흔들어 그네를 밀어 보낸다."라구 시구를 보고, 난 설헌이 "잘 지었다. 다만 한 구가 잘못 되었구나"하니, 동생 균이 "어떤 어구가 잘못 되었습니까?" 라고 되물으니, 난설헌이 곧 붓을 끌어 쓰며"문 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백마를 타고 황금채찍질 하면서 가버렸다." 라고 고쳐주었다. <교거쇄편, 제 2권 중>
난설헌은 15세가 되던 해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과 혼인 하였다. 안동 김씨라 가문인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조선 후기 때의 안동 김씨를 말하는 것. 명문가이기는 하나 조선 중기 당시 김성립의 가문은 허난설헌의 가문보다는 떨어진다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김성립의 평가가 매우 좋지 못하고 (허난설헌이 너무 뛰어나 그 부분을 부각 시키기 위해서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허난설헌이 살았을 때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과거를 핑계 삼아 별거 중에도 기생집에서 노는 등 그 악평이 가득하였으나, 당시 과거 시험이라는 것이 그리 놀아서 합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김성립의 성품이 많이 인색하게 각색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든다.
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이 자신의 매부인 김성립에 대해 "누나보다 못하고 공부만 할 뿐 실제로는 경전이나 역사도 제대로 모른다." 라고 평가했다는 일화도 있으나, 허균은 17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21세에 급제하여 후에 우참찬(정2품)이라는 고위직까지 올랐던 천재이다. 그 기준으로 자신의 매부를 봤으니 어쩌면 허균 자신을 가르쳤던 누이에 비해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 했을지 모르겠다. 다만, 성품이 고지식하고 굽히지 않는 옹고집스런 면과 가부장적인 면이 강해 허난설헌의 입장에서는 매우 힘들었을거라 생각된다.
여하튼, 허난설헌의 남편이었던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죽은 뒤 과거에 합격했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보아 그 됨됨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질이 강직하고 방정하며, 자기 물건 이외의 것으로 허식하는 것은 마음에 둔 바 없고, 항상 독서만 하면서 강가에 집을 지어 문을 개방하고 정신수양을 하였다.
(동시대 인물인 이수광이 쓴 김성립의 묘비명)
아울러, 분명한 사실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에 평가에서도 보듯이 허난설헌이 남편에 비해 훨씬 뛰어났다는 것. 남편과의 금술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남편과도 금술도 좋지 못한 관계에서 시어머니에게도 엄청난 시집살이를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는 가부장적인 면이 강했던 사회...... 자유로운 가풍속에 자랐던 그것도 엄청난 천재 여류 시인이자, 문장가인 허난설헌을 그 시어머니도 어쩌면 그의 남편이었던 김성립도 달갑지 못했을 것이고.....아니 버거웠다는 봐야 하는게 맞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 우
감우 感遇’란 느낀 대로 노래한다는 의미이다.
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영영창하란 지엽하분분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서풍일피불 영락비추상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수색종조췌 청향종불사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감물상아심 체루고의몌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이렇듯, 힘든 결혼 생활과 시집 살이를 한 허난설헌의 불행은 이것이 다가 아닌 시작이었다.
아직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남편은 허난설헌을 나둔채 공부 한다고 떠나있고, 당시 두 아이의 엄마로만도 힘든 그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힘든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1579년 그녀의 첫째아이이자, 어여쁜 딸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580년 자신을 정말 어여삐 사랑했던 아버지 허엽이 죽었다. (경상감사의 관직에서 해임되어 돌아오던 중 경상북도 상주의 한 객관에서 객사함.) 이것만으로도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을었을텐데.....살아야되는 마지막 이유일지 모르는 그녀의 어린 둘째 아들 역시 이듬해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셋째를 임신하고 있던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뱃속에 있던 아이마저 유산하고 말았다.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 사랑하는 딸 여의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디 슬픈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두 무덤이 마주보고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소슬한 바람 불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도깨비불은 무덤가 나무 밝히네
紙錢招汝魂(지전소여혼)
종이돈 살라 너희 혼을 부르고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정화수를 올려 제사를 지낸다
應知第兄魂(응지제형혼)
너희 넋은 응당 오누이임을 알지니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겠지
縱有服中孩(종유복중해)
비롯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어찌 잘 크기를 바랄 수 있으리오
浪吟黃臺詞(랑음황대사)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고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 흘리며 소리 죽여 슬퍼한다
그리고, 항상 자신을 그리 아끼고 예뻐해줬던 오라버니 허봉이 이이를 탄핵하다 오히려 귀양을 갔고, 풀려난지 얼마되지 않은 1588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불행에 불행이 겹친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는지 시를 남겼고, 시에 나타난 것처럼 27세의 나이로 한 많은 목숨을 거두었다. (사실, 살아있었다면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던 막내 허균이 대역죄인으로 몰려 능치처참 당하는 모습을 봤을 텐데....그 모습을 보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라고 생각 되었지만, 이미 넘치고 충분한 한 많은 삶이었기에.....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靑鸞倚彩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기대었구나.芙蓉三九朶 /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난설헌이 죽고 자신의 한 많고 기구한 인생이 자신의 재주 때문이라도 생각했던 그녀는 유언으로 자신의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시는 족히 방 한칸 분량이 되고도 남았지만,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작들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하지만, 천재적인 그녀의 작품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 했던 그녀의 동생 허균이 그녀가 친정집에 남겨놓고 간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고, 문장에 뛰어나 외교관으로서 사신접대가 많았던 그가 중국 명나라 사신들에게 그 글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 사신이었던 주지번,양유년 등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 매우 경탄을 금치 못하였으며, 이를 중국에 가져가 [허난설헌집]을 간행하였고, 당시 '낙양의 종이값을 이 책이 다 올려 놓았다.'라고 말할 정도 였으며 후대에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조선으로 사신을 보낼 때 안평대군의 글씨와 난설헌집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고 하니 그 위상과 인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 되어진다.
어느덧,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 아이들
잠시 허난설헌의 삶에 대해 생각했던 나는 밝게 웃는 모습의 우리 두 아들을 보며 생각했고 기원했다.
'네 녀석들이 태어나던 날 내가 바랬던 건 너희들의 비범함도 영특함도 아니고 단지 건강하게 잘 자라줬으면 하는 것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욕심을 내고 있는 거 같구나. 다시 그때의 그 초심을 소중히 생각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며 살테니 지금처럼 계속 밝고 건강하게 자라주길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