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불안이 아닌 존중 불안
퇴사 한 달 후, 클럽장님의 권유로 함께 여수 금오도 여행을 떠났다. 평일에도 집에서 책만 읽고 있었던 내가 가장 적합한 여행 동료였을 것이다. 그날 밤 숙소에서 대화하며 나눠 마셨던 작은 맥주 캔 하나는, 시원함을 느끼기에 딱 적당한 양이었다.
“주훈 씨 주위 젊은 사람 중 먹고 살기 어려운 분이 있나요?”
“네 당연히 있죠! 요즘 먹고 사는 게 다 걱정입니다. 이직은 언제 어디로 할지, 집은 어디에 살지, 커리어는 어떻게 쌓을지 말이죠”
“아니, 제가 말하는 것은 진짜 먹고 자고 사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입니다. 의식주 차원에서요.”
속된 말로 순간 뻥졌다. 클럽장님이 질문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고 있던 ‘먹고 사는 문제'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먹고 사느라 바쁘지'를 단어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이 성과사회에서는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한 문제를 ‘먹고 사는 문제'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강한 충격을 받고 몇 초간 침묵하다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네.. 제 주위에 그런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의식주 차원에서 어려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생존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생존 불안'이 해결돼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생존 불안'이 아닌 ‘존중 불안'이 그들을 달리게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색채가 강한 한국에서는 돈으로 사람의 가치가 매겨진다. 친구보다 많이 벌지 못하면, 자신이 더 가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에게 존중받기 위해 달리기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필요 이상의 소비를 하며 산다. 필요 이상의 큰 집, 동창회에 나갔을 때 자랑할 외제차, 이런 것들을 누리기 위해 청춘을 갈아 넣는다. 사는 게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전화드릴 시간도 없이 말이다. 필요 이상의 소비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퇴근 후에도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책을 읽더라도 자신의 ‘가치'가 아닌 ‘값어치'를 올릴 공부만 한다. 그렇게 우리는 멈춰 서서 자신을 마주할 시간조차 없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이 집까지만 사고! 불로소득 월 200만 만들어 놓고!’라고 하며 우리는 삶을 향유할 시간을 계속 뒤로 미룬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미래를 향해 줄곧 ‘잠정적'인 상태로만 살아간다. 삶에 공백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며, 더 열정적으로 일에 얼굴을 파묻는다. 우리가 자라온 이 사회는 어떻게 삶을 향유할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노출되는 여러 광고로 인해 우리는 훌륭한 소비자로 키워져 왔다. 광고는 우리의 ‘존중 불안'을 이용해 돈을 번다. 고급차, 날씬한 몸매, 넓은 아파트. 우리의 상황과 계속 비교하게 하고,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패배자가 된 느낌이 들게 만들어 소비를 유발한다.
차와 휴대폰을 가지고 있어도, 신차와 신기종이 나오면 그것을 손에 넣고 싶어 한다. 새로운 것과 비교되어 1년 전에 산 물건은 금방 구형이 되어버린다. 여기에는 광고도 한몫하는데 조금 바뀐 부분을 마치 혁신이라도 일어난 듯 과장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잘 작동하는 휴대폰을 두고도, 약간의 카메라 화소를 올리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차라리 그 돈으로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자연을 보는 눈을 기르는 게 훨씬 의미 있을 것이다.
금오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불멸의 고전 <월든>을 읽었다. 19세기 미국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숲속으로 도끼 하나를 들고 들어가 작은 오두막을 짓고 생활한다. 소로는 최소한의 일을 하며 자연을 만끽하고, 즐거운 고독에 빠지고, 책을 읽는다. 삶을 영위하는데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에서 의식주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몇 가지 도구, 즉 칼, 도끼, 삽, 손수레 등이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등불, 문구 그리고 몇 권의 책이 필요한데 이런 것은 모두 싼 값에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현명하지 못한 이들은 나중에 편안하고 따뜻하게 살 수 있다면서 지구 반대편의 야만적이고 불건전한 지역으로 건너가 10년이고 20년이고 사업에 전념하다가 결국 뉴잉글랜드로 돌아와 죽는다. 호사스러울 정도로 부자인 사람들은 편안할 정도로만 따뜻함을 누리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지 않게 뜨거움을 경험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름의 독특한 방식에 따라 외열로 요리가 되어버린다.
대부분 사치품과 인생을 안락하게 하는 많은 편의품은 굳이 없어도 될 뿐만 아니라 인류 정신을 고양하는 데는 커다란 방해물이 된다.”
오늘날의 우리는 소로처럼 칼, 도끼, 삽, 손수레 만으로는 살아갈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존중 불안'만 떨쳐버릴 수 있다면, 필요 이상의 돈을 벌기 위해 허덕이지 않아도 된다. 여유 있게 소중한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자신을 마주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나에게 질문해보자 “정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그렇게 달리고 있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