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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무드 Aug 02. 2023

Ep.7 망망대해

거울을 보는 데 괜스레 눈물이 났다.





거울을 보는 데 괜스레 눈물이 났다. 내 인생은 왜 이리 비루할까. 독해지고 싶었다. 감정에 동요되고 싶지 않았다. 사춘기가 시작됐던 걸까. 수첩을 꺼내들고 매직으로 진하게 적는다. ‘울지 마, 손주희’라고 적어 거울에 붙였다. 눈물이 나올 때마다 거울을 보고 되새겼다.



엄마의 자살시도는 사실 몇 번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를 낳고 과거에 얽매여 옥죄여있는 느낌으로 힘들 때 개인상담을 한 적이 있다. ‘엄마를 두고 나만 떨어져 타지에 나와 있는 이 상황이 너무 두려워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데, 자존감이 낮아진 나는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요. 고통, 힘듦의 허들을 의연하게 넘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해요. 엄마도 힘들었겠지만 그런 엄마를 보면서 크던 나에게도 병이 생겼다. 아이를 낳은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불안의 연속으로 이상한 증상들을 겪게 되었다.





초등학교 내내 전학 다니면서 여러 선생님을 만나고 친구, 학우들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혹은 지방에서 또 서울에서 배움을 오가며 하나 배운 게 있다. 지역이 어디든 잘못된 어른들의 사고방식은 아이들도 배운다는 것. 제대로 된 어른들을 만나지 못하면 그게 아이의 인격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충남에서 학교를 다닐 땐, 시골이라 그런지 시골은 참 이상한 소문들을 만들어 낸다. 나에 대한 소문은 이랬다. ‘쟤네 엄마가 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버리고 갔다더라. 쟤네 엄마 이상한 일한다더라. 쟤네 엄마 딴 남자랑 살림 차렸다더라.’ 이런 얘기들이 떠돌았다. 그 소문을 만들어내고 퍼트린 애가 한 명 있었다. 시골엔 다자녀 가정 친구들이 간혹 있었는데, 그 애도 7남매, 8남매 정도..?였었고, 엄마가 다른 사람이랑 재혼하면서 중간에 두 자매가 같은 나이가 우리 학교 같은 학년에 존재했다. 한 명은 쌔련 된 여자애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만들던 소위 일짱 무리 여자애 중 한 명이었다.)였고, 한 명은 그냥 좀 촌티 나는 조용한 시골 소녀 이미지였다.

쌔련 된 여자애는 본인 치장에 부단히 노력하던 애다. 매일 화장에 타이트한 교복에 예쁜 물건들 가방, 신발 등 예뻐 보이려고 발악하는 모습이었다. 자기 동생이 같은 학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차릴 때면 극도로 예민해졌다. 왜냐하면 그 동생은 겉모습이 화려하지도 않았고, 그냥 수더분한 눈치를 많이 보는 친구였다. 어이가 없었다. 너도 그런 사연이 있으면서 나에 대한 얘기를 그렇게 거짓으로 말하고 다니다니. 화는 안 났지만 알려주고 싶었다. 아니 제대로 사실을 알려주고 걔를 누르고 싶었다. 너나 나나 부모가 그럴 수밖에 없어서 이런 거지 다들 똑같이 사는 거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하교하는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드디어 마주친 그 애 뒤통수를 실내화 가방으로 그 애 뒤통수를 갈겼다. 조용히 말하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면서 옆 친구에게 말하더라 “야야! 엄마 없는 애 온다. 빨리 가자!” 하....... 진짜 쟤를 어떻게 조질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찼다.

가방으로 한방 맞은 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선다. 참 예쁘게도 생겼다. 이름이 최정원이라는 애였는데, 키도 크고 엄청 마른 데다가 눈은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보조개도 있었다. 예쁘장한 애가 왜 저럴까 싶었다. 가타부타, 일목요연하게 말할 틈이 없었다. 그러기도 싫었다.

“야 너네 엄마도 재혼했다며, 너 니 친동생도 아는 척 안 한다며 너나나나 피차일반이네 네 처지도 딱하다. 근데 그 처지 잘 알면서 나를 그렇게 건드리면 안 되지. 나한테 사과해.”

“......”

허점을 찔린 듯 가만히 서서는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눈물이 차오르지만 흐르진 않는다. 살짝 몸싸움이 있었다. 머리채를 잡혔다. 나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걔보다 조금 작았는데, 휘청했다. 지고 싶지 않아 반듯하게 올려 묶은 그 애의 똥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한참을 몸싸움을 하고 말싸움이 시작됐다. 이상하게 그 애는 말로써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애랑 싸울 생각이 없었다. 감정을 건드릴 마음도 없었고, 어른들의 잘못에 우리 같은 애들이 상처받지 말자 상처를 주지도 말자 만 알려주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쿨하게 사과는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언급하지 않도록 했다.

전학도 자주 했는데, 이러한 이슈들은 정말이지 매번 일어났다. 아빠 없는 친구랑 놀지말라는 아줌마도 있었고, 한부모가정, 재혼가정이라는 사실은 나를 정말 힘들게 했다.

위에서 말했듯 제대로 된 어른들을 만나지 못하면 그게 아이의 인격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건 정말이지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이 사회가 피폐해지는 길이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유명하듯 한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 잘 몰랐던 엄마, 무지했던 어른들, 옳고 그름의 경계에서 혼동했던 사람들. 자아가 불안했던 나,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했던 나는 친구도, 가족도, 그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쯤인가 왕따를 한번 당했다. 상대의 기분을 헤아리면서 말하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를 피했었다. 나 왕따 당해서 학교 가기 싫다고 엄마한테 말했는데, 오히려 동생들 앞에서 혼났다. 왕따를 당하는건 이유가 있다나... 엄마는 역시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고, 또.. 그냥 또... 어영부영 넘어갔다. 그때 충격은 정말 상당하다. 아무도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여러 방황, 여러가지 경험 끝에 친구 사귀는 법을 중학생이 되어서 알게되었다. 중학교 2-3학년 때는 다행히도 좋은 단짝 친구를 만났다. 공부를 잘하던 친군데, 놓쳤던 학습에도 어느 정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또 하고 싶은 것도 생겼다. 미술이다. 엄마는 사실 금전적으로 조금 힘들때였는지 나보고 미술을 안 하면 어떻겠냐고 반대를 조금 했지만, 그래도 미술 교습소에서 배울 수 있도록 해주셨다. 사실 나를 안아주고 아픔을 알아주고 인간답게 대해주던 선생님이 좋았던 걸까. 사람에게 마음을 나누고 주고, 털어놓고 의지하기 시작했었다. 그때 만난 선생님은 내게 아직까지도 은사님으로 언니처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꿈이 있다는 건 욕심이었을까 엄마 아빠 그리고 가족들에게 불화가 시작되었다. 피아노 학원을 가고 싶다고 말했던 여동생은 피아노 학원을 가고 싶어도 말을 못 했는데, 언니는 미술 학원을 다니냐며 질투 아닌 질투를 했고, 둘째 동생도 부당하다며 의견들이 반발했다. 당연히 아빠와 엄마 싸움도 많아졌다. 이유가 내가 미술 학원을 다녀서. 뿐 아니라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 셋을 키우다 보니 그맘때쯤 우리 집의 분위기는 불안 그 자체였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다음 편에 정리하도록 해보겠다.




사람은 가정환경이 참 중요하다고 하더라. 맞는 말이다. 조용조용 차분차분한 집에서 살고 싶었다. 매일이 전쟁터 같은 곳에서 살기 싫었다. 나태하고 게으르고 책임 전가하고 방관하고 무관심한 집에서 살다 보면 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이기적이고 악질에다가 싹수없고 교활한 인격체가 형성된다. 나도 그랬다. 모든 일에서 빠져나가려고 교활한 뱀이 되었다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개복치가 되었다가 건드리면 무는 미친 개도 되었다가 그랬다. 이때 나를 돌이켜보면 쓰레기 더미 정리되지 않은 유기견 보호 센터에 겁 많고 으르렁거리는 유기견 한 마리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이 글을 쓴다 한들 그때의 나를 치유할 수 있겠냐마는.. 어떻게든 나는 나를 구해야 한다. 기억은 지울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나를 안아줘야 한다. 오늘의 기록이 쓰라린 상처가 될지라도. 큰 흉터가 남을지라도 나는 나를 알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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